미국 영암군홍보대사 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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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미국 영암군홍보대사 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아!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5>

강감찬 정자, 많은 분들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망루에 서서 바라보니 대동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높푸른 가을 하늘, 그 아래 푸르게 굽이쳐 흘러가는 대동강. 그리고 저만치 강변에 부벽루가 있다.
‘부벽루’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와 시구가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읽었던 것인데 몇 십 년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시인이 부벽루에 올라 아름다운 경치에 취했는데 기둥에 붙은 시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모두 뜯어버리고 자기가 시를 지었다. 그런데 몇 자를 쓰고 더 이상 시가 써지지 않아 울면서 떠나갔다는 얘기다. 그가 쓴 시의 마지막 부분 “까맣게 점 찍은 듯 산, 산, 산...”이라는 구절도 생생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였는지 중학교 때 교과서였는지 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이야기라 잊혀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후, 시인이 여말 김황원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9년 전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 대동강변 ‘련광정’에 걸려 있던 현판,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를 접할 수가 있었다. ‘긴 성벽 한쪽 면에는 늠실늠실 강물이요, 넓은 벌 동쪽 끝으로는 띄엄띄엄 산들일세’라는 뜻이다.
그 이야기가 실린 교과서가 어느 때였는지 늘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북한을 방문하게 되면서 우연히 유흥준씨가 쓴, <나의문화유산답사기 4>를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 교과서 이야기기 실려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에 실렸다고 했다. 저자가 필자와 비슷한 나이니, 같은 교과서를 배웠던 게 틀림없었다.
답사기에는 <대동강>이라는 단원으로 김황원 이야기가 실려 있는 1962년도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가 누렇게 바랜 사진으로 나와 있었다. 책 내용이 나와 있는 사진이 보이는데 높다랗게 을밀대가 있고 그 아래 대동강 가에 부벽루가 있었다. 단원 전문이 거의 그대로 실려 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 글을 읽는 동안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시절로 돌아갔다. 3학년 때의 담임선생이며, 내 짝궁이며,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위에 소개한 김황원의 시는 초등학생 수준에 맞게 다음과 같이 실려 있었다.
평양성을 끼고 흐르는 강물,
아, 넓기도 하여라.
강 건너 멀리 아득한 벌판 동쪽에는
점 찍은 듯 까맣게 산, 산, 산.......

그러고 보니 마지막 줄 ‘점 찍은 듯 까맣게 산, 산, 산...’을 나는 ‘까맣게 점 찍은 듯 산, 산, 산...’으로 잘 못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뭐 그런 게 대수랴. ‘산, 산, 산...’이라는 끝 대목이 워낙 강렬하였으니 그 부분이 틀리지 않았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초등학교 3학년 열 살쯤의 나이에 배웠던 것을 60년도 넘은 지금 생생히 떠올리고 있으니, 미완성된 이 시가 어린 우리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렇게 어떤 장소와 관련된 문학작품은 독자를 통해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 글에 나와 있는 현장을 찾아가 보고 싶도록 만든다. 해남 땅끝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걸어서 종단할 때,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란 작품의 현장인 강원도 창평 땅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필자의 수필집 <쌍코뺑이를 아시나요>에 나오는 ‘쌍코뺑이 언덕’을 보려고 사람들이 필자의 고향을 찾아오더라는 얘기를 마을 형님으로부터 들은 적도 있다.
을밀대에서 바라보니 건너편 쪽 봉우리에 망루가 보인다. 칠성루라 했다. 성벽 뒤로 돌아가 을밀대를 올려다보니 튼튼한 돌벽이 아슬하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흠하나 없는 걸 보니 당시의 성 쌓는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만하다.<사진1>
을밀대 계단 앞쪽에 남녀가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이곳에선 주패놀이라 부른단다. 김 참사에게 카드는 서양문물인데 어떻게 주민들이 카드놀이를 하느냐고 묻자, 벌써 오래전 군인들이 무료한 시간에 카드놀이를 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하락을 했단다. 그래서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주패를 즐기게 되었다는 얘기다.
을밀대를 떠나 길 따라 내려오는데 ‘국보유적 제1호 평양성’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길 따라 키 높이로 아래까지 뻗어있는 돌담이다. 화장실을 찾아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두 아이를 데리고 언덕 아래서 은행을 까고 있다. 정주에 사는 데 평양 딸네 집에 왔다고 한다. 사는 게 어떠세요, 물었더니 그냥 희미하게 웃으신다.
중년이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 세 분이 언덕을 올라오신다.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십니까” 물었더니 “감찬 성에 갑네다” 대답한다. 그러고 보니 성벽 넘어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아주머니를 뒤따라 내려갔더니 강감찬 장군 동상이 보이고 바로 앞에 정자를 세워놓았다. 대동강이 한 눈에 굽어보인다. 경치 좋은 곳에 정자가 세워진다. 여기서도 정자가 가득하도록 많은 분들이 어울려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얼핏 서른 명은 넘어 보인다. 녹음기 한 대를 틀어 놓고 빙빙 돌며 흥을 돋우고 있다. <사진2>
시간이 꽤 지났다. 김 참사와 함께 소나무 숲길을 내려오면서 보니 소나무 마다 중간쯤에 비닐을 감아놓았다. 벌레를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 때 한국에서 솔잎흑파리가 번져 소나무를 거의 전멸 상태에 몰아간 적이 있었다. 저렇게 감아놓은 비닐에 겨울을 나기 위해 벌레가 모여들면 고스란히 벗겨가 불태워버린다고 한다.
어두워진 대동강엔 젊은 남녀들이

숙소에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김 참사와 함께 대동강 산책을 나갔다. 사람을 쉽게 판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둡다. 깜깜한 지하 통로를 건너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가방, 반 값에 팝네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아주머니가 가방을 사라고 한다. 서울 지하철 계단에서 바닥에 물건을 펼쳐놓고 세일을 하던데 이곳은 저렇게 물건을 파는가 보다. 몇 발자국 걷다보니 길가 모퉁이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할머니가 빵과 옥수수를 팔고 있다.
9년 전 방문 했을 때, 평양 시내는 밤이 되면 우리가 묵은 고려호텔 주변에 가로등 몇 개가 서 있을 뿐, 해가 지면 거대한 도시가 어둠 속에 잠겨 들어갔다. 어둠에 잠긴 도시는 적막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 같지만 아직 힘든 터널을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대동강 가에 이르렀다. 강 건너편도 이쪽도 깜깜하다. 잔잔한 물결 위에 달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둠 속에 대동교 아치가 둥글게 반짝거리고 그 빛이 강물 위에 반사되어 강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뻗어있다. 왼쪽으로는 주체탑 긴 그림자가 물에 어리고, 오른쪽은 양각호텔의 높은 등불들이 물 위에 깜박거린다. 캄캄한 속에 작은 불빛들은 유난하다. 이렇게 도심 속 강가에서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인지도 모른다.
어둑한 강가를 청춘 남녀가 손잡고 거닐고 있다. 강변을 천천히 걸어가는데 오른쪽 숲속 어둑한 벤치에서 청춘남녀가 속삭이더니 우리가 지나가자 얘기를 멈춘다. 두 개의 실루엣이 하나가 되기도 한다. 청춘의 사랑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호텔로 돌아와 김 참사는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구내 다방에 들렀다.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가 혼자 지키고 있다. ‘전금희’라는 명찰을 달았다. 손님도 나 혼자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눈다기보다 내가 주로 물었다. 집안 이야기, 학교 시절의 이야기, 결혼 이야기 등,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북한 방문 4일째 이야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정문
오전에 전쟁기념관을 방문하는 일정이다. 운전사가 어느새 와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결혼은 했냐고 물었더니, 같은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 연애결혼을 했고 아이가 하나 있다고 한다. 원호위원회에서 근무했다기에 그곳이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은 혼자 아셔야 합니다.” 하고 말문을 막는다. 알려지면 안 되는 일인가 보다.
시내버스가 지나간다. “내나라 제일로 좋아”라는 글씨가 보인다. 대동강변 놀잇배에도 걸려 있던 내용이다. <사진3>
전쟁기념관 옮겨진 푸에블로호

전쟁기념관 앞에 도착했다. 관광버스 네 대가 도착해 있고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정문에 ‘조국해방전선승리기념탑’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우리는 학교에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1953년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고 배웠다. 휴전이란 승리도 패배도 아닌 전쟁이 중지된 상태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북한은 휴전일을 전쟁승리의 날로 기념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2013년 7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잊혀진 승리”라고 말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사진4>기념관 담 넘어 유경호텔이 서있다. 105층짜리 피라미드 형 호텔인데 1987년 착공한 건물이다. 9년 전 왔을 때는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현재 외관은 완성되었고 내부공사가 진행 중이라 했다. 3천개의 객실을 가진 북한 최대의 호텔이 될거라 한다.
평양 시내버스. ‘내나라 제일로 좋아’라는 글씨가 보인다.
안내원을 따라 들어가니 널따란 광장 저편으로 하얀 건물이 보인다. 광장 오른쪽은 전쟁을 형상화해놓은 조형물들이 늘어서 있다. 가까운 곳에 노획한 무기가 전시되어있다.
푸에블로호가 보인다. 지난 방문 때는 대동강 변에 있었는데 이쪽으로 옮겨온 모양이다. 안내원이 설명을 시작한다. “1866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변에 나타나 우리를 위협했을 때, 관민이 똘똘 뭉쳐 그 배를 물리쳤다. 그로부터 100년 후인 1968년 미국의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우리 영해를 침범했을 때, 또 다시 우리는 그들을 물리치고 저 배를 전리품으로 붙잡아 놓았다.” 당시 푸에블로호에 올라가 격투 끝에 직접 미군을 제압했던 사람이 안내원으로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랬다. 9년 전 방문 때도 비슷한 설명을 들었다. 50년 가까운 아득한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내가 고등학교 때였을까. 그 때 한반도에 전쟁이 터지는 줄 알았다. 북한이 미국의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했다는 보도가 대문짝만하게 신문을 장식했다. 북한은 배가 영해를 침범했으므로 정당한 나포라고 주장했고, 미국은 원산에서 40km 떨어진 공해상에 배가 있었으므로 나포는 북한의 군사도발이라고 맞섰다.
당시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은 즉시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원산 앞 바다로 출동시키고, 오끼나와에 있던 전투기 360대를 한반도 주변에 배치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밀월관계에 있던 소련정부로 하여금 북한에 압력을 가해 푸에불로호를 반환하고 선원을 석방토록 부탁했다.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 티토 대통령과 루마니아의 체차우세스쿠 대통령을 평양까지 가게 해서 김일성을 설득했다. 그러나 북한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쟁은 시간문제 인 듯싶었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미국과 북한은 일주일 뒤 협상에 들어갔다. 미국은 북한에 억류되어 있던 82명 승무원의 목숨을 버릴 수 없었고, 월남전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협상결과 승무원들은 돌려보내고 배는 억류되었다.
나포한 푸에불로호를 원산항에 놓아두었다가 98년에 대동강 변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그나저나 평양으로 흐르는 물길도 없는데 저렇게 큰 배를 원산에서 대동강까지 어떻게 끌어 올 수 있었을까. 안내원에게 물었지만 모르겠다고 했다. 궁금증은 북한을 떠나온 다음, 미국에 돌아와서야 풀렸다.
북한 당국이 푸에블로호에 인공기를 달고 화물선으로 위장해 남한 주변의 공해를 9일이나 돌아 대동강까지 끌고 갔다. 정찰위성으로 북한을 손바닥처럼 감시한다는 미 정보기관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 후,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가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 당국이 그를 대동강가에 있는 프에블로호로 안내했다. 이를 바라보는 그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53m 길이의 큰 배가 움직이는 것도 감지하지 못하면서 자몽만한 플루토늄 덩어리의 밀반출을 막는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고 그는 칼럼에서 꼬집었다. 9년 전 일이 엊그제 일인 양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사진5>
전시관 안에 갖가지 자료가 전시되어있다. 대전전투를 형상화 해놓았는데 의자에 앉아있으면 무대가 돌아가면서 구경할 수 있는 구조다. 40명이 1년 반 동안 작업을 했다고 한다.
안내원이 전시관을 방문하는 숫자가 하루 만명을 넘는다고 소개한다. 곧이어 ‘6·25는 북침’이라고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며 설명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남침’이라고 배웠다. 완전히 다른 얘기다.
지난 2013년이었던가. 대한민국 청소년 중 70% 정도가 ‘6·25는 북침으로 발발했다’고 알고 있다는 여론조사결과가 발표됐다. 급기야 대통령이 나서서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질책했다. 일부 언론은 편향된 교육을 시킨 때문이라며 전교조를 몰아세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청소년들이 “‘열’심히 ‘공’부한다”를 줄여서 ‘열공’이라고 하듯이, 그들의 인터넷 습관으로 ‘북침’을 ‘북’한이 ‘침’공한 것의 줄인 말로 이해한데서 비롯된, 어이없는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대한민국에서 교육 받은 사람은 6·25전쟁이 남침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북한은 정반대의 얘기를 하고 있지 않는가.
6·25는 북침인가, 아니면 남침인가. 미국에 들어온 다음, 그 부분에 관한 여러 기록을 살펴보았다. 객관적으로 설명해줄 믿을만한 분이 누굴까. 리영희 선생이 쓴 책, <대화>를 다시 꺼내 읽었다. 리영희(1929-2010) 선생은 평안북도 출신으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 많은 저서와 글을 통해 민족의 앞길을 밝히며 ‘이 시대의 양심’으로 추앙받던 분이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공언했던 분이다. <대화>112-114쪽에 기술된 내용이다.
“고르바초프 정권 이후에 과거 소련의 한국전쟁 관계 기밀문서가 대량으로 기밀해제 되어서 누구나가 볼 수 있게 됐어요. 등소평 이후에 중국 정부도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 사이에 오고간 방대한 양의 극비문서와 자료들을 공개했지. 십여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이런 극비자료들이 대량으로 6.25연구자들에게 제공됨으로써 6.25가 북한에 의해 애치슨 성명이 있기 훨씬 전인 1948년 말경부터 치밀하게 진행됐다는 것은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밝혀졌지요.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후르시쵸프의 유명한 회고록은 김일성이 애치슨 성명 전인 1949년 말에 모스코바를 방문해서 스탈린에게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남조선은 첫 일격에 무너질 것이다. 첫 일격으로 남조선 인민의 폭동이 일어나서 전쟁은 단시일에 끝날 것이다”라고 한 말을 기록하고 있어요.<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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