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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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방문 11일째 이야기

아침밥을 먹고 잠깐 방에 올라가는 길에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복도에서 만났다. 그동안 몇 번 마주쳐서 낯이 익은 분이다. 어디 사시냐고 물으니 이 부근이라고 대답한다. 아파트에서 사느냐고 다시 물으니 창전아파트에서 산다고 한다. 아니, 그 좋은 고급아파트에서 사시느냐고 놀란 표정을 지었더니, 우리 북조선에서는 노동자가 우선순위로 입주 하도록 되어있다며 당연하다는 듯 얘기를 한다. 전기세라든가 관리비는 많이 들지 않느냐고 재차 물었다. “일 없습네다.” 웃으며 받아 넘긴다.
운전사 방 동무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다. 8시 출발. 자동차가 창전거리를 지나가는데 아침에 청소 아주머니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아파트를 새로 건립하면 분양은 어떤 식으로 하느냐고 김 참사에게 물었다. 아파트 가까운 거리에 직장이 있는 노동자를 우선 입주시키고, 다음으로 군경 유자녀나 항일열사 가족 등이 입주한다고 한다. 유자녀를 배려하는 것은 뒷일 걱정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의미라고 덧붙인다.
좋지 않은 도로사정 남한이 건설했으면…
평양과학기술대학 표지판이 보인다. 멀리 건물 옥상에 붉은 글씨로 “선군 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를 크게 써 놓았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고속도로가 놓여있고, 거리는 220㎞라고 한다. 평양을 벗어나니 창밖으로 계단식 논이 보인다. 낮은 구릉은 밭을 일구어 놓았다. 민둥산이 많다. 주민들의 땔감문제가 해결되면 민둥산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우리 어릴 적, 봄이면 어린 학생들까지 동원하여 나무를 심었지만 민둥산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농촌의 땔감문제가 해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산이 푸르러 지는 걸 보았다. 나무 얘기가 화제에 오르자 김 참사가 황해남도에 과일군이 있다고 소개한다. 사과, 배, 복숭아 등 각종 과일을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군이라고 했다. 얘기를 하는 동안 오른쪽 산허리에 ‘애국림’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해외 동포들이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이쪽 도로는 묘향산이나 판문점 가는 길에 비해 도로 사정이 더 좋지 않은 모양이다. 군데군데 패인 곳이 많고 도로를 고치고 있는 곳도 여러 곳이다. 4차선 정도의 넓이인데 차선이 없다. 중앙선도 없다. 그냥 운전사가 적당히 알아서 운전을 하면서 간다. 그래도 자동차가 많지 않아 통행이 가능한 모양이다.
북한에 도로를 건설할 경우 비용은 얼마나 들까. 토지보상비 등을 제외한 공사비와 인건비 등을 추산해 보면, 남한의 70% 수준이 될 것이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나진선봉 지구, 개성공단 등 산업단지 개발도 중요하지만 낙후된 도로·항만·철도 등 기본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든다.
남한에서 건설에 참여한다면 서로에게 윈윈이 될 것이다. 남한은 축적된 자본력과 공사경험이 있으니 도로나 항만 철도 건설을 누구보다 잘 해낼 것이고, 그 대가로 북한에 무진장 묻혀있는 각종 지하자원을 남쪽에서 가져가면 될 것이다. 남북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사이 중국이 그 일을 대행하면서 북한 경제를 잠식하고 있다지 않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남북 관계가 어려운 현실을 감안할 때, 외국자본을 들여와 건설하는 방법은 없을까. 세계은행 김용 총재가 북한 경제건설에 관심을 보였다. 인터뷰를 통해 "북한이 개방한다면 아낌없이 줄 겁니다"라고 말했다. 김 총재는 부모가 이북 출신이다. 그는 지금 막강한 힘을 가진 세계은행 총재다. 낙후된 인프라를 개발하는 데 그가 움직인다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당국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좋겠다.
신평휴게소에서 러시아 교포를 만나다
신평휴게소에서 러시아 교포2세를 만났다
앞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고 기름수송차가 언덕을 올라간다. “기름차가 송달 나간단 말입네다.” 운전사 방 동무가 한 마디 한다. 높은 산비탈에도 밭을 일구어 놓았다. 가능한 곳은 모두 개간하여 식량을 생산한다고 김 참사가 설명한다. 보리와 밀은 2모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식량증산을 위해 저런 산기슭에 밭을 개간하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홍수가 나면 속수무책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좀 쉬었다 가자며 휴게소에 차를 세운다. 신평휴게소다. 휴게소 앞에 제법 넓은 호수가 있어 경치가 그만이다. 먹을 게 있는가 싶어 들어가 보았더니 간단한 과자류와 음료수를 팔고 있다. 이 지방에서 나오는 특산물도 몇 가지 놓여있다. 한쪽 구석에 ‘황구렁이 술’이라고 써 붙여 놓았다. 큰 유리병에 황구렁이 한 마리가 들어있다. 한잔에 한 유로(1.3달러)라고 한다. 강냉이로 담근 술은 50도라고 한다. 추운 지역이라 독한 술을 담가 마시는 모양이다. 소형 밴 차 한 대가 도착한다. 60대로 보이는 남자를 중심으로 대여섯 명 관광객이 차에서 내린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왔다고 한다. 남자가 한인 2세라 하는데 한국말을 전혀 못한다. 사업가이자 작가라고 수행원이 소개를 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했다. 예순넷 이라고 본인의 나이를 밝히며 블라디보스톡에 올 일이 있거든 꼭 연락하시라고 한다.
서로 외국에 사는 동포라는 사실이 금방 마음을 통하게 한다. 교포 2세나 3세가 되면 저렇게 한국말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워진다. 부모들이 관심을 가지고 한국말을 가르치긴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쓴 글을 내 아들 딸이 제대로 읽어주지 못한다는 게 참 아쉽다. 한국학교 교장을 하면서까지 나름 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현지에서 태어나 교육 받은 아이들에게는 한국어가 고국의 언어긴 해도 어차피 외국어다. 불편하지 않을 만큼 한국어를 구사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종업원 책 읽는 모습에서 옛 일 떠올리다
종업원이 한 쪽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열일고여덟 되어 보이는 여자종업원이다. 무슨 책이냐고 물었더니 책 제목을 보여준다. ‘새봄’ 이라는 책이다. 여러 사람이 돌려 보았는지 책이 많이 닳았다. 토지개혁에 관한 내용인데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전에 ‘양지마을’ 이라는 제목으로 티비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다고 했다. 지난번 묘향산에서는 여자 안내원이 비전향 장기수에 관한 책을 탐독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 안내원은 토지개혁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앳된 시골 여자 아이가 책 읽는 모습을 보니 저맘때쯤의 내 어릴 적 일이 생각난다. 중학을 졸업하고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을 못하고 농사를 짓고 있을 때였다. 책을 읽고 싶은데 책이 없었다. 책을 사볼 만한 처지는 못 되고, 이웃에게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시골동네라 읽을 만한 책이 많지 않았다. 이웃 마을은 물론 읍내 아는 집에서도 책을 빌려 왔지만 그것도 금방 동이 났다. 신문도 이장 집으로 배달되는 00신문 한 가지뿐이었다. 그조차도 며칠 분이 한꺼번에 오기 일쑤였다. 전깃불도 없던 시절, 등잔불 밑에서 읽을거리면 무엇이든 걸신들린 듯 읽었다. 읍내 선배가 빌려준 스무 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가슴 두근거리며 읽었던 것도 그때였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던 어느 날, 이장 집으로 배달되어 온 ‘농원’ 잡지에서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통신강좌 광고를 보았다. 책을 주문했다. 표지가 밤색으로 된 열두 권짜리 한 질이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 공부를 했다. 여름철이면, 고구마를 저장하기 위해 파놓았던 굴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여름 굴속은 시원하고 조용했다. 촛불 한 자루면 굴 안이 환했다. 극성스럽던 모기도 굴속까지 쫒아 들어오지는 못했다. 작은 밥상을 펴놓고 책을 읽던 시절이 생각난다. 꼭 저 아가씨만한 시절이었다.
솔재령굴. 황해북도 신평군, 강원도 법동군 경계다.
다시 출발. 골짜기에서 소떼가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얼마 가지 않아 ‘솔재령굴’ 입구에 도착했다. 굴 이쪽은 황해북도 신평군이고, 굴을 지나면 강원도 법동군이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길가 아주머니들이 머루와 다래를 팔고 있다. 남한에서도 휴게소 부근에는 물건이나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이 있는데 이쪽도 비슷하다.
굴은 차 한 대가 비켜갈 수 있는 2차선 길이다. 깜깜하다. 전등을 달아놓지 않았을까.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길을 안내한다.
남한 땅을 걸어서 국토종단과 횡단을 할 때 보니 의외로 굴이 많았다. 빙빙 돌아 산을 넘어가던 길을 산허리에 굴을 뚫어 직선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강원도 지역을 휴선선 따라 걸어가면서도 몇 개의 굴을 통과했다. 4㎞가까이 되는 것도 있었다. 세상에, 10리길을 굴속으로 걸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4차선 굴이었다. 굴은 양 옆으로 인도가 있고, 통풍장치와 전등, 그리고 군데군데 대피소와 공중전화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만든 서울 강능 구간의 대관령 터널이 25.75㎞라는 소식을 들었다. 50리가 넘는 굴을 뚫었다는 얘기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장비와 노하우를 가져와 북한에도 그런 굴을 뚫을 수 있을텐데. 그 시절이 언제쯤일까.
원산, 만경봉호는 부두에 기대어 졸고
원산 금강산 일대가 국제적 관광 명소가 될거란다. ‘솔재령굴’을 지나니 원산이 금방이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다. 로타리를 돌아가는데 원산우체국이 보인다. 6·25때 함포사격으로 시내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다고 김 참사가 설명한다. 푸에블로호가 이 앞바다에서 나포되었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지금은 강원도 소재지이고, 관광중심지로 변모 중이라고 한다. 여기서 멀지 않은 금강산, 그리고 마식령 스키장과 연계시킨다면 훌륭한 관광벨트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산 비행장도 건설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금년(2015년) 11월 원산 갈마비행장이 완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반도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원산과 금강산 일대가 국제적인 관광 명소가 될거라는 보도도 함께 들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송도원 해수욕장 옆 식당을 찾았다. 모래사장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주위는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년 남자가 낚시를 하고 있다. 오가는 아주머니들, 그리고 제복을 입은 대학생 몇이 지나가는 모습도 보인다.
창가에 앉아서도 송림원이 보인다. 일본식민지 시대에는 서울서 돈푼이나 있다는 사람들은 여름이면 경원선 기차로 여덟 시간이나 걸려 원산에 닿아 송도원 해수욕장에서 몸을 식히고, 동해선 기차로 금강산을 다녀가곤 했다고 식당 주인이 얘기해준다.
매운탕을 주문했다. “밥이 찹쌀을 섞었는지 차분합네다” 운전사 방 동무의 얘기다. 말들 듣고 보니 밥맛이 차지고 좋다. 햅쌀밥이어서 그런가, 싶다가 이 부근 안변평야에서 나는 쌀이 임금님이 드시는 진상 쌀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첫째 원산(元山), 둘째 전주(全州), 셋째 박천(博川)을 꼽았다고 한다. 이것이 언제부터 내려오는 속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밖에도 주택가로 가장 좋은 곳으로는 강릉(江陵)과 해주(海州), 그리고 함흥(咸興)을 친다고 했단다. 원산이 살기 좋은 곳 첫 번째로 꼽히는 이유는 이곳이 농산물·해산물이 풍부하여 인심이 좋았고 또 사람들의 품격이 그만했던 것이 아니겠냐고, 원산이 고향인 이호철 소설가가 어떤 글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항구 부근을 돌아보았다. 명사십리가 어디쯤인지 모르겠다. 사실 원산에서 해수욕장으로 말하자면 명사십리가 송림원 보다 훨씬 유명하다. 명사십리는 모윤숙의 시를 통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남한의 완도에 명사십리라는 같은 이름의 해수욕장이 있다. 그러나 원산의 명사십리와 완도의 '명사'는 그 어원부터가 다르다. 원산의 명사십리는 '밝을 明'자에 '모래 沙', 그러니까 깨끗한 모래가 십리나 뻗혔다는 뜻이고, 완도 신지면의 명사십리는 '울 鳴'자에 '모래 沙'로서, 모래 우는 소리가 십리까지 들린다는 뜻이다.
모윤숙은 본디 정주 출신인데 고모가 살고 있는 원산에 자주 놀러와 명사십리에 관한 시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정주라는 지명이 생각난 김에 그곳 출신 백석 시인을 아느냐고 김 참사에게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한다. 김일성 대학을 졸업했다는 그가 백석을 모르단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한에서도 오랫동안 알려지지 못했던 시인이 한둘이 아니었고, 백석 시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으니까.
한 지역이 그 지역 출신이 쓴 문학작품 혹은 노래로 인해 널리 알려지게 된 예는 많다. 명사십리가 모윤숙의 시로 유명해진 것처럼 강원도 평창지역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하고, 내 고향 전남 영암도 가수 하춘화가 부른 노래 ‘영암 아리랑’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만경봉호가 항구에 메여있다. 원산과 일본 니가타 사이를 오가며 북송 교포 및 조총련대표단과 화물을 운송하던 9천600톤급 화물 여객선이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는 이 배에 응원단을 태우고 참석하여 숙소로 이용되었으며, 그 때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 유명해진 배이기도 하다. 길이가 162m라니 꽤 큰 배다. 지금은 할 일이 별로 없는지 한가히 부두에 기대어 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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