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스케이트장이 규격에 맞춰 잘 만들어져있다. 평양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았고, 사리원에서도 광장에서 롤러스케이트를 멋지게 타고 노는 아이들을 보았다. 요즈음 북한에서는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 타는 게 유행인지도 모르겠다.
큰길까지 걸어 나와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으러 근처에 있는 아리랑 식당에 들어서는데, 일요일이라선지 손님이 붐빈다. 강냉이국수를 주문했다. 맛이 일품이다. 국물이 담백하고 면발이 쫄깃쫄깃 한 게 입에 착 달라붙는다. 강냉이 국수가 이렇게 맛이 있는 줄은 몰랐다. 가격은 3달러. 오늘 강냉이 국수를 처음 먹어보았다.
점심을 먹고 나서 호텔 구내매점에 들렀다. 이곳도 손님들이 붐빈다. 여자용 반코트에 3만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300달러 정도라는 얘기다. ‘옷입어보는 칸’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저렇게 쉬운 우리말로 표기된 이름들을 보니, 남한 거리에 넘쳐나는 외국어로 된 표지판들이 떠오른다. 외래어에 오염되어 있는 언어습관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소화도 시킬 겸, 혼자서 호텔 주변 아파트촌으로 산책을 나갔다. 일요일에 주민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돌아보고 싶기도 했다.
아파트 골목길에 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나지막한 시멘트 기둥을 세워놓았다. 골목에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다. 골목 길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고추와 강냉이를 말리고 있다. 바로 옆 빨랫줄에는 크고 작은 빨래들이 걸려있다. 휴일이라 모처럼 시간을 내어 식구들의 빨래를 했는가 보다.
남정네들 대여섯이 길 가운에 빙 둘러앉아 장기를 두고 있다. 장기 삼매경에 빠져 누가 지나가는지 관심조차 없다. 그 옆에서 한 아주머니가 팔을 걷어붙이고 그릇을 닦고 있다. 밀려있는 집안일을 하는 모양이다.
골목입구 노점상이 오늘은 두 개로 늘어났다. 두 곳 모두 손님이 심심찮게 다녀간다. 천천히 걷다 보니 광장까지 걸어오게 되었다. 북한에서 생산되는 SUV ‘삼천리’ 자동차가 보인다. 광장에도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다. 가까운 곳에 백화점이 있다. 이따금 시내버스가 도착한다. 버스를 향해 사람들이 몰려가고, 택시가 멈추면 사람들이 또 달려간다. 택시 잡기가 대단히 어렵다.
릉라 곱등어관서 돌고래쇼 보다
김 참사가 릉라 곱등어관에 가보자고 한다. 릉라 인민유원지 안에 있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가니 금방이다. 돌고래쇼를 하는 곳이다. 돌고래를 북한에서는 곱등어로 부르는 모양이다.
관람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다. 1천400석이라는 좌석이 이미 꽉 차있다. 가족 끼리 온 사람, 직장 동료와 온 사람, 친구들과 함께 왔다는 청소년들도 있다. 이곳이 휴일 평양 시민들이 가고 싶은 곳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장소라고 한다. 중앙에는 대형 수조가 좌·우측에는 보조 수조가 설치되어 있고, 대형 스크린이 전면에 걸려있다.
공연이 시작된다. 남녀 진행자가 재치 있는 말솜씨로 쇼를 이끌어간다. 돌고래는 조련사의 지시에 따라 뒤로 서서가기, 동시 솟구치기, 연속 공치기 등 재치 있게 기교를 부린다. 조련사와 함께 물속을 돌기도 하고, 축구 골대에 골을 넣기도 한다. 그 때마다 관중들이 박수를 치거나 박장대소하며 환호한다.
미국 내가 사는 마을에서 멀지 않은 샌디에이고 시월드에서도 돌고래 쇼를 한다. 곱등어쇼 몇 가지는 그쪽 돌고래쇼와 비슷하다. 최근 동물애호가들의 성화에 못 이겨 머잖아 시월드 돌고래쇼가 중단되고 돌고래들을 바다로 방류할 거라는 기사를 봤다. 북한 주민들이 미국처럼 곱등어쇼를 중단하라고 요구할 것 같지는 않지만 앞일을 또 누가 알겠는가.
릉라 인민유원지는 곱등어관을 비롯 능라 물놀이장, 놀이공원 등의 시설이 있다고 한다. 남쪽 연합뉴스가 취재하여 방영한 덕분에 꽤 많은 남한 국민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서울에 들러서야 알게 되었다.
주민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을 계속 늘여가고 있다고 한다. 엊그제 다녀왔던 마식령 스키장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했다. 정치란 게 별거 아니다. 국민들이 잘 먹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게 정치가 할 일이다.
평양의 일요일 풍경(2)
곱등어쇼를 보고 나서 숙소에 돌아왔다. 일요일 오후, 아직 해가 많이 남아있어 가벼운 차림으로 밖으로 나왔다. 가능하면 많이 보고 듣고 돌아가는 게 어렵게 성사된 이번 여행을 그만큼 의미있게 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긴다.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는 건 아무래도 아파트 부근이 좋을 성 싶다. 어느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서니 창고 앞에 고구마를 가득 담은 박스가 줄지어 늘어서있다. 고구마가 잘 여물어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각 가정에 나누어줄 모양이다.
‘배급’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서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한다. 내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처럼 개인의 능력이나 기호에 따라 각 개인이 재화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여 생필품을 배급해주는 나라다. 그렇지만 북한에서 부분적으로 시장제도가 도입되고 남한에서 국민 복지를 일정부분 국가가 책임지는 것처럼, 결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차용하면서 변화되어 가기 마련이다. 인류가 만든 유일하게 좋은 사회제도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성밥공장’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밥을 지어내는 곳인 모양이다. ‘닭공장’에서 닭을 공업적으로 길러낸다는 것처럼 저곳도 영양가를 고려하여 과학적으로 건강에 좋은 밥을 만드는 곳일까. 호텔에 들어와 찻집 종업원에게 밥공장이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주부가 아침 일찍 출근하거나 저녁 늦게 퇴근하는 경우 등, 집에서 밥을 해먹기 어려운 경우에 밥을 공급해주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다. 한 끼도 다음으로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골목을 돌아 나오니, 5,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번개탄에 불을 붙이고 있다. 방금 불을 피워 놓은 듯, 연탄 위에 씌워놓은 양철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아주머니는 헐렁한 몸빼 바지에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서서 골목 어귀 저쪽을 바라보고 있다. 영락없는 우리 이웃집 아주머니 모습이다. 외출한 남편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놀러 나간 손주 녀석이 달려오면서 ‘함무이’하고 품속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오늘 저녁 무슨 음식을 만들어 가족들의 입맛을 돋우어 줄까를 궁리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사람 사는 게, 행복이란 게 별거 아니다. 식구들이 밥상머리에 둘러 앉아 오붓하게 밥을 먹는 거, 그게 매일 얻을 수 있는 행복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대동강 가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강물에서 작은 배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부자간인 듯 어른과 아이가 한 배에 타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노를 젓는 풍경도 있다. 빈 배들이 강가에 여러 척 매어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배다.
강가를 걷다가 해가 설핏하여 숙소로 돌아오는 길. 배구 코트에서 청소년들이 배구 시합을 하고 있다. 바로 옆 테니스 코트에서는 중년 부부들이 복식 테니스 게임을 즐기고 있다. 일요일이라 모두들 저렇게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숙소에 돌아오니 김 참사가 아침에 만났던 장충성당 김철웅 회장이 나를 만나러 오겠노라는 연락을 해왔다고 전해준다. 무슨 일일까. 한참 후, 김 회장이 찾아왔다고 하여 아래층에 내려갔다.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아침에 주었던 가톨릭 성가집을 돌려달라고 한다. 순간 좀 당황스러웠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지난 번 방문 때 봉수교회에서 한 권 받아갔던 경험도 있어서 무리 없는 부탁이라고 생각 했다. 그렇지만 책을 돌려달라는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지 않겠나 생각되었다.
잠깐 기다리시라 말해놓고, 방에 올라가 책을 가져왔다. 성가집을 돌려주면서 웃으며 한 마디 건넸다. “줬다가 빼앗으면 머리에 뿔나는 거 아시죠?” 그도 웃으면서 대꾸를 한다. “아, 미안합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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