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때 황후를 온통 사로잡은 이가 있었다. 요승(妖僧) 라스푸틴이다. 그는 알렉세이가 앓고 있던 혈우병을 치료했다고 알려진다. 그가 최면술에 능했다는 점으로 미뤄 아마 증상을 가볍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정도 아닐까 싶다. 어쨌든 사랑하는 아들이 혈우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자 라스푸틴은 황후로부터 그야말로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 매사를 그에게서만 자문을 구했고, 살아있는 '성자(聖者)' 내지는 황제와 황후의 '절친'이 된다.
이처럼 황제와 황후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라스푸틴은 막강한 권세를 누린다. 그는 짐짓 궁정에서는 매우 정중하고 소박한 것처럼 보인 반면, 궁정 밖에서는 귀부인들에게 '육체의 속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감언이설로 속여 숱한 여성들을 농락했다. 수상 스톨리핀은 이런 라스푸틴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내려 했으나, 실패했고 암살까지 당한다. 이제 하늘을 찌르는 듯한 라스푸틴의 권세에 모두가 숨 죽일 수밖에 없었다.
라스푸틴이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15년 황제가 총사령관으로 전선에 출동하면서부터다. 황제가 없는 틈을 타 그는 황후를 마음대로 움직여 전횡을 일삼는다. 장관들이 그의 입맛에 따라 임명되고 하루가 멀다않고 개각이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황후를 통해 전선에 나간 황제에게 '명령'을 내렸다. 황후는 매일같이 편지를 써 황제에게 '성자'의 조언을 전했다.
라스푸틴의 전횡이 이처럼 극에 달하자 안팎에는 그와 황후가 동침했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 그러던 중 1916년 대중들의 시위가 격해지고 병사들의 동요도 뚜렷해지면서 황실과 귀족사회에서는 라스푸틴의 전횡에 놀아나는 황제를 퇴위시키고 라스푸틴을 죽여 황실을 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 주모자는 황제의 조카인 이리나 공주의 남편 유스포프 공과 푸리슈케비치였다.
라스푸틴을 유스포프의 저택으로 불러낸 이들은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와 독이 든 포도주를 올려놓아 라스푸틴이 이를 먹고 마시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독이 퍼진 라스푸틴은 죽지않았다고 한다. 참다못한 유스포프가 권총으로 라스푸틴을 저격했으나 비틀거릴 뿐이었다. 푸리슈케비치도 권총을 쏴 간신히 쓰러뜨린 뒤, 밧줄로 양손을 묶고 얼음을 깨고 강물 속으로 던져 넣은 뒤에야 사태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흘 뒤 발견된 라스푸틴의 시체는 손을 묶은 밧줄이 풀려 있었고, 폐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의 사인은 독에 중독돼 죽은 것도 아니고, 총 맞아 죽은 것도 아니며, 익사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까지도 끝내 미스터리였다는 얘기다. 어쨌든 라스푸틴을 없애 황실을 구하려던 이들은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으나, 기울어가는 로마노프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는 쫓겨났고, 1년 뒤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4년 동안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로마노프 왕조는 이처럼 요승 라스푸틴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걸은 것이다.
라스푸틴은 원래는 시베리아의 농민 출신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말을 훔치다가 마을에서 쫓겨난 뒤 수도원을 전전하게 된다. 그가 속한 종파는 최면술을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신흥종교였다고 전한다. 1904년 페테르부르크에 입성한 그는 귀부인들을 최면술로 꾀어내 많은 신도들을 확보했고, 마침내는 황후 알렉산드라까지도 사로잡았던 것이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온 국민이 충격과 비탄에 잠긴 가운데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수록된 2007년 7월 20일자 미 대사관의 외교전문이 주목을 받고 있다. 윌리엄 스탠턴 당시 주한 미 부대사는 한국의 대선을 앞둔 각 당 후보들의 상황과 판세, 대선이슈 등을 본국에 보고하면서 당시 한나라당 경선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최태민이 인격 형성기에 박 후보의 심신(body and soul)을 완전히 지배했고, 최태민의 자제들이 그 결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루머가 널리 퍼져있다"고 전하며 최태민을 요승 라스푸틴에 비유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지금 최태민의 딸 최순실 역시 박 대통령의 심신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던 사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어제 드러난 사실이 오늘 밝혀진 사실에 묻힐 정도로 비리와 추문은 끝도 없다. 2007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최씨 일가의 전횡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거나 동조했던 이들은 하나둘씩 배신하고 발뺌하느라 바쁘다. 혼용무도(昏庸無道). 무능하고 어리석은 군주 탓에 온통 세상이 어지럽다. 혼군(昏君)과 비선이 필연으로 얽힌 난국은 꼬일 대로 꼬여간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대한민국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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