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남쪽에서는 어떻게 했을까. 돌아온 다음 자료를 찾아보았다. 이남에서도 1950년 정부수립 초기에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이 아니었다. 우선 한 농가가 가질 수 있는 농지의 면적을 제한했다. 그 면적을 넘는 나머지 농지를 정부가 구입하여,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유상으로 분배하는 방식을 취했다. 정부는 농민에게 일정기간 농사를 지어 토지대금을 분할 납부하게 했고, 그 돈으로 토지구입비를 충당했다.
방법의 차이는 있었지만, 토지개혁을 통해 남과 북이 공히 예전과는 다른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만수대 창작사
김 참사와 함께 만수대 창작사에 들렀다. 방문 기념으로 그림이나 수예 작품을 구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길가에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말이 표지석에 새겨져있다. 엊그제 왔을 때는 왜 보지 못했을까. 저 구호를 보고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90년대 중반 먹을 게 없어서 몇 십만이 굶어죽었다는, 그 시절의 구호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대명천지에 어떻게 먹을 게 없어 그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지,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어떻게 사태를 그리되도록 방치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대체 이념이란 게 무엇인가. 인륜은, 핏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전시장에 올라갔다. 진열된 작품을 둘러보았다. 북한의 수예작품은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다고 했다. 수예작품 한 점을 골라 안내원에게 보였다. 350달러란다. 값을 흥정하려고 하니 자기는 그럴 권한이 없다면서 다른 사람을 부른다. 나이든 아주머니가 나온다. 전시장 책임자인 모양이다.
“좀 잘 해 주세요”
“이건 원래 값이 눅어서 안 됩니다”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에누리가 뭡니까”
“아, 깎아달라는 뜻입니다. ”
옆에서 흥정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김 참사가 거든다.
“미국에서 특별한 일로 오신 작가분인데 좀 잘해주십시오”
“아, 기러십니까. 친선적 가격으로 300달러만 내십시오”
심장 속에 남는 사람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아무래도 노래방까지 갈 성 싶다는 생각이 든다. 참석자들이 남한 노래를 부르게 되면 답례로 북한 노래 한 곡쯤은 불러야 할 텐데 제대로 아는 북한 노래가 한 곡도 없다. 9년 전 평통 방문단으로 왔을 때 판문점 가는 차안에서 배웠던 노래, <심장 속에 남는 사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인생의 길엔 상봉과 리별 / 그 얼마나 많으랴”로 시작하는 노래다. 꽤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는데 부르지 않다 보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래층 찻집에 내려가 아가씨에게 물어보았다. 2절까지 가사를 가르쳐준다. 다른 노래도 몇 가지 함께 배웠는데 이 노래만 일부나마 기억에 남았다. 가사가 좋아서 몇 번 불렀던 노래다.
“인생의 길엔 상봉과 리별 / 그 얼마나 많으랴 / 인생의 길엔 상봉과 리별 / 그 얼마나 많으랴 / 헤여진대도 헤여진대도 /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 아아 그런 사람 나는 귀중해 // 오랜 세월을 같이 있어도 /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 잠간 만나도 잠간 만나도 /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 아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어”
송별 만찬
좀 쉬었다가 저녁 식사 자리에 나갔다. 해외동포위원회 미주지역 담당관이 송별회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내가 북한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가 해주었던 부서의 책임자라고 했다. 알고 보니 지난번 방북 때 만났던 분이다. K씨다. 구면인 셈이다. 반갑게 악수를 했다. 서민적이고 사교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던 사람이다. 분위기가 쉽게 화기애애해졌다.
노래방이 딸린 식당이다. 김 참사와 운전사 방동무, 그리고 해동 쪽에서 몇 분이 함께한 조촐한 저녁 식사다. 밥을 먹으면서 술이 한 순배 돌았다.
머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주신데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통일을 위해 남과 북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알고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 오랜 세월동안 적대관계로 있다 보니 그럴만한 사정이 못되었다. 북한을 널리 둘러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 이번 방문이 헛되지 않도록, 돌아가면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미국의 동포사회를 비롯하여 도처에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술이 몇 잔씩 돌아갔다. 취흥이 도도해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술이란 참 좋은 것이다. 음악이란 게 본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서먹했던 자리가 어느새 부드럽게 변한다.
웬만큼 분위기가 무르익고 시간도 지나 파할 때가 되었을 때, 책임자에게 얘기를 꺼냈다.
“미국에서는 북한에 들어가면 잡혀간다며 사람들이 북한 방문을 꺼리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이곳에 와서 우리 법을 어기지 않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도 미국인 몇 사람이 잡혀있지 않습니까.”
“법을 어겼으니 그렇게 된 거지요.”
“위법하지 않으면 문제될 게 없다는 말입니까.”
“절대 문제가 없습니다. 미주 동포 중 우리 조국에 오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승인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제 이름을 걸고 약속 합니다”
식사가 끝나자 K씨가 바래다주겠단다. 깜깜한 평양 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체류 마지막 밤이다. 엎치락뒤치락 잠이 오지 않는다.
깜깜한 평양의 거리. 저 거리를 서울이나 뉴욕처럼 환하게 밝힐 수는 없을까. 그 열쇠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남쪽이 아닐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남쪽이 도약할 수 있는 열쇠는 북쪽이 가지고 있다. 압록강을 건너 실크로드로 가는 길. 그 길이야 말로 남쪽에 희망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길은 그렇게 환히 보이는데, 왜 그리도 오랜 세월을 서로 으르렁 거리며 노려만 보고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통이다. 평화롭게 교류협력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통일의 길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일을 누가 해주겠는가. 남과 북이 해내야 한다. 결국은 자주, 그리고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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