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스 데이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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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스 데이 단상

오래 전에 필자가 쓴, '운수 좋은 날'이라는 시다. 이 글을 읽은 어느 독자가 제목이 왜 운수 '좋은' 날이냐고 묻기에 그냥 웃음으로 받아 넘긴 기억이 있다.
그랬다. 그런 때가 있었다. 요즘은 아이들이 커서 제 아비 어미 생일을 챙겨주는 덕에 꼬박꼬박 받아먹는 처지가 됐지만 아내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다음 해 생일이던가. 이번엔 잊지 않고 장미 한 다즌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반겨할 줄 알았는데 "이 비싼 것을 뭐하러 한 다발씩이나 사왔냐"고 아내로부터 퉁방을 맞았다. 어느 해는 국화꽃 화분을 하나 샀다. 그랬더니 "장례식장에나 어울리는 흰 국화"라며 또 퇴자를 먹었다. 그 후로 꽃 같은 걸 사가는 건 잊어먹기로 작정했다.
세월이 참 빠르다. 어느새 나도 아내도 머리에 서리가 제법 내렸다. 맞벌이 부부가 우리네 뿐이겠는가마는, 당번이라며 시도 때도 없이 직장에 불려나가는 아내를 볼 때면 짠한 느낌이 든다. 때로 내가 앵벌이 두목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다가 시 한 편을 썼다. '아내'라는 시다. 이를테면 헌시獻詩인 셈이다.
"대숲이 / 바람에 쓸린다 // 속 빈 대나무를 저리 / 높이 키워 올린 것은 / 큰 바람에 낭창 휘어지다가 / 버팅기며 끝내 일어서는 것은 / 짱짱하게 받쳐 준 / 마디 / 때문이다"
어떤 작가는 자기 글을 읽어주는 첫 독자가 아내라고 자랑하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집사람은 내가 쓴 글에 관심이 없다. 그간 책을 몇 권 냈지만 그마저도 아내가 읽어주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발렌타인데이 얘기가 들려온다. 지금까지 그런 건 젊은 애들이나 관심 있는 거라고 치부해왔는데 생각해보니 꼭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다. 늙어가는 청춘일수록 배우자에게 꽃 한 송이 전할 날도 그만큼 줄어갈 것이 아닌가.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안팎으로 시절이 하 수상하지만, 그래도, 아니 그럴수록, 개개인의 삶이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금년 발렌타인에는 초콜릿이나 장미꽃에 내가 쓴 시 한 편을 담아 아내에게 주어볼까. 맘에 드는 어느 시인의 시 한 줄이면 또 어떤가. 그러면 아내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속마음은 감추며 언젠가처럼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아니 이 비싼 꽃을 뭐하러 사왔소, 돈도 많소 잉!" 그러면 나도 딴청을 피우며 속으로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이 사람아, 사는 게 별거 아니여..."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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