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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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과 나

1980년 5월 나는 병영생활 중이었다. 대부분 학생들이 대학생활과정에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 후 대학과정을 다시 하였기 때문이다. 군 생활을 하던 나는 그해 오월 뜻밖의 상황을 맞이하였다. 군 생활 중 광주·전남에서 폭동이 일어나 이를 진압해야 한다며 훈련을 받은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전남지역은 문제의 지역이라는 오명과 함께 전남지역 출신들은 각종 얼차려와 군기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군 생활 중이라 광주 상황을 확인할 수도 없었고 각종 언론 등 매스컴도 진실한 소식을 전해주지 않아 그 까닭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역 후에야 나는 5·18은 우리나라의 진정한 민주화운동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많은 광주·전남 시민이 학살당하였고 그런 가슴 아픈 일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렇다. 나도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더라면 전두환 신군부의 폭동진압부대에 의해 죽임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제대 후 나는 신학대학에 다시 입학하였다. 5·18의 아픈 기억과 상처는 기독청년으로서의 신앙고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군부독재의 압재 속에서 운동권으로 활동하면서 최 일선에 나섰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산하 기독청년협의회 상임총무 역할을 맡아 활동하였다. 각종 집회 시에 지라시를 돌리는 등 활동하다 금남로에서 경찰에게 여러 번 붙잡혀 유치장에 가기도 했다. 5·18로 인해 희생당한 무고한 영령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은 최선을 다해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 광주에서는 박종철, 이한열 열사 등 많은 민주투사들이 생겨나 민주화의 선봉이 되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노력은 1987년 6·29선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민주화의 열매는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를 탄생하게 했다. 얼마나 값진 투쟁과 희생의 결과였던가? 이제 5·18의 기억은 나에게 그저 하나의 추억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탄생한다고 어느 역사학자가 말한 기억이 난다. 그날! 5·18 민주화운동 때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한 광주지역의 피가 헛되지 않고 우리나라의 민주화의 초석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나는 장애인 복지를 위해 30여년을 보냈다. 그 가운데 내가 겪은 특별한 일은 5·18로 인해 장애를 입은 이들의 아픔이었다. 지금은 국가유공자로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5·18이후에 폭도로 내몰려 복지혜택에서도 예외가 되고 사회경제적으로도 많은 소외를 당했다. 공수부대의 무차별 폭행으로 입은 장애는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지고 그런 트라우마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되는 서글픔과 안타까움을 주었다.
이제 문재인 정부 1년이 지났다.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전문에 넣겠다는 대통령 약속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희생당한 영령들을 향한 최고의 실천이 될 것이다. 발표명령자를 밝히는 노력 등 삼척동자도 다 아는 진실을 외면하는 일부 보수야당 정치인들을 이번 6·13선거를 통해 심판해야 한다. 6·13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후보자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와 정의사회를 위한 적임자라고 큰 소리 친다. 그러나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의 승리를 알린 고귀한 영령들의 외침을 이어받는 후보가 진정한 민주 후보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 민주화운동의 참된 주춧돌을 쌓았던 분들은 망월동 5·18 국립묘역에 지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묻혀 있다. 지구촌에서 하나밖에 없는 분단된 나라 대한민국, 이젠 평화통일을 원하는 국민들의 꿈이 이루어져야한다.
5·18 민주화운동은 이 땅에 참된 민주화를 넘어 평화통일을 이루고자 군부독재를 향해 저항하고 희생당하신 우리 광주·전남지역 영령들이 피운 꽃이었다. 이제 우리 광주·전남지역민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승리의 결과가 헛되지 않길 바랄뿐이다.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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