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군과 (사)왕인박사현창협회가 주최하고 왕인문화연구소가 주관한 이날 학술강연회에서는 박광순 대한민국학술원 교수가 '조선 통신사와 왕인박사의 만남'이라는 주제 강연을 한 것을 비롯해, 구지현 선문대 교수가 '남용익의 통신사행으로 본 왕인',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가 '왕인박사 기록의 데이터베이스 편찬의 필요성과 그 방안', 일본 오사카역사박물관 오사와 겐이치(大澤硏一) 학예과장이 '조선 통신사와 왕인박사의 만남'이라는 주제 강연을 했다.
또 사회를 맡은 정성일 광주여대 교수가 '조선 통신사의 여정과 경제·문화사적 의의'라는 주제 강연을 한 뒤 청중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학술강연회의 주제 강연 주요내용을 요약했다. <편집자註>
■ '조선 통신사와 왕인박사의 만남'
왕인 관련 국내자료 발굴 및 학제적 연구 주력할 때
일본의 왕인인식 일관되지 않고 정치상황 따라 변화
왕인문화연구소는 그동안 여러 측면에서 왕인박사의 행적과 공적 등에 관해 연구해왔고, 그 결과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나, 그 성과가 아직 한국사학계의 공론으로 정립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 중요한 이유는 고고학 분야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연구가 일본 측 자료에 의존해오고 있어 국내 학자들에게는 생소하거나 그 신빙성에 회의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이제 왕인문화연구소가 주력해야 할 과제는 한국 측 자료의 발굴과 그에 전거한 연구, 특히 학제적 연구다.
그러나 당장 한국 측 자료를 발굴하고 그에 전거해 왕인을 논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그 중간과정으로 비록 일본에서 얻은 자료일지라도 한국인이 보고 듣고 모아 정리한 자료를 바탕으로 왕인에 관해 논한 문헌들에 전거하는 연구과정이 필요하다. 이 연구목적에 가장 적합한 자료가 조선통신사들의 '사행록'과 '필담창화집',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연구물이다.
특히 통신사들의 '사행록'과 '필담창화집' 등을 중시하는 까닭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4년간 열 두 차례 계속된 통신사들의 숫자는 무려 5천357명이며, 이를 연간으로 평균해보면 약 26명에 달하는데, 당시 그 정도의 지식인들이 매년 일본에 가 현지의 관료 및 지식인들로부터 국정(國情)은 물론, 역사와 문화에 관해 직접 보고 듣고, 비록 필담으로나마 의견을 나누는 한편, 일반서민 특히 에도(江戶)나 오사카의 죠닌(町人)들의 경제활동을 보고 돌아와 거기에서 얻은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각종 저술에 문자로 남김으로써 주는 충격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에 이번 학술대회는 조선통신사 및 수행원들의 사행기를 중심으로 일본에서의 왕인 인식이 어떠했으며, 사행사들과 교류가 잦았던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당시 한국지식인들의 왕인 인식은 어떠했는지를 다뤄보자는 취지다. 또 필자는 첫째로 후기통신사 이전의 국내자료, 특히 '김극기의 월출산 詩'를 살펴보고, 둘째로 일본에서의 왕인박사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살피되, 그 뿌리라 할 수 있는 『일본서기』의 왕인인식을『고사기』와 비교해 다루고자 한다.
통신사의 사행록과 실학자들의 저술을 살펴보기에 앞서, 비록 왕인(和邇)이라는 이름은 뚜렷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내용으로 보아 그 글이 왕인을 다루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글들이 없지 않다. 12세기 고려 명종조 김극기의 ‘월출산 시’(『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남도 영암군 산천조 '월출산' 시)도 그 하나가 아닌가 한다. 노봉(老峰) 김극기는 고려 명종 때의 문신이요 시인(특히 '농민시'의 개척자)이다. 김극기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의주 좌장, 금나라 사신 등을 거쳐 한림원에 들어갔으나 곧 사직하고 우리 산하를 여행하던 중, 영암에 들렀을 때 월출산의 빼어난 경치를 보고 여러 날 머물면서 지은 시가 바로 '월출산'이다. 시 속에 나오는 '상사', '해상', '석초해', '알성', '삽상유풍천고취', '종신불부념고리', '방분', '이옹' 등이 모두 왕인박사의 일대기를 회상하는 추모시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통신사들의 사행록에 보이는 왕인박사에 대해서는 1655년 을미통신사행의 종사관으로 수행한 남용익이 『부상록』이라는 유명한 사행록을 남기고 있다. 남용익은 응신왕대의 을사년에 백제가 왕자 왕인을 보냈다고 적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왕인라는 이름이 명시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부상록』의 왕인기사는 왕인을 왕자로 보고 있는 사실 외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왕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가 어디서 누구로부터 이 같은 얘기를 들었는지, 혹은 일본의 사서를 직접 보았는지도 자상치 않아 아쉽다. 이제부터 우리가 밝혀야 할 과제다.
1719년 기해통신사행의 제술관으로 수행한 신유한이 남긴 사행록 『해유록(海遊錄)』에는 “왜국은 옛적에 문자가 없었는데 백제왕이 문사 왕인과 아직기(阿直岐)등을 보내어 처음으로 문자를 가르쳤다. 여러 해 동안 가르쳐서 대략 전한 것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 신유한은 아직기를 처음으로 소개하면서 왕인과 함께 문사로 기록하고 동시에 그들이 처음으로 일본에 문자를 전하고 가르친 학자로 인식하고 있는데 바른 이해라 생각된다. 또한 신유한은 백제시대에 의복제도와 불교를 전한 사실도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신유한의 『해유록』은 앞선 『부상록』에 비해 왕인 등에 관하여 좀 더 정확하게 전하고 있는 점에 의의가 있다.
1763년 계미통신사의 정사인 조엄의 일본사행록 『해사일기』에는 고대 한일 양국의 교류사에 관해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일본이 백제를 통해 경전과 불교를 수입했다는 사실과 왕인과 아직기 기사에 이어 강항과 후지하라 세이카와의 교류사실도 소개해 이전의 해사록보다 일본사정을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또 일본 유학을 설명하는 첫머리에 왕인과 아직기를 자리매김했다는 것은 왕인을 일본 유학의 첫머리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도 왕인의 도일연대를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엄도 『일본서기』를 직접 보지는 않는 것 같다. 왕인과 아직기에 대해 '박사'라는 칭호를 사용한 점은 주목된다.
본론과 직접 관련은 없으나 조엄의 사행업적을 얘기하면서 빠트릴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가 바로 고구마를 일본에서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그 보장법과 재배법을 보급해 구황식품으로 널리 이용케 했다는 점이다. 고구마는 감저(甘藷), 남감저(南甘藷)등과 함께 조저(趙藷)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마의 우리나라 전래와 보급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어 단정하기 어려우나,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조저(趙藷)'라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 조엄과 고구마와는 관련이 깊은 식품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렇다면 통신사들의 업적은 단순한 문화전수에 그치지 아니하고 경제생활의 면에서도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상의 마지막 통신사라 할 수 있는 계미통신사는 1763년 8월부터 1764년 7월까지 거의 1년간에 걸쳐 이뤄졌는데, 그에 알맞게 정사(조엄)의 『해사일기』를 비롯해 아홉 가지의 '사행록'을 배출케 한 바 있다. 그중에서도 부사의 서기로 수행한 원중거는 『승사록』, 『화국지』, 『일동조아』 등 세 가지의 일본 견문록을 저술해 통신사의 일본인식 중 최고봉이라 평가받는다. 왕인에 대한 이해도 지금까지의 사행록의 그것들보다는 훨씬 자세해 훗날 실학파의 왕인이해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왕인은 응신왕조에 문자를 전수하고 왕자를 교육했으며, 일본 시문의 비조(鼻祖)로 소개한다. 원중거는 그저 현지의 사람들로부터 전문한 바를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직접 일본의 사서를 살핀 것으로 보인다. 체재 기간이 1년 가까이로 길었으니 능히 가능했을 것이다.
실학자들의 저술에 나타난 왕인을 보면, 북학파 실학자로 분류되는 이덕무는 원중거와 같은 연암그룹의 일원이고, 인척간이라 평생 활발하게 교류하는 사이였다. 이덕무의 왕인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원중거로부터 얻은 정보에 크게 의존한 듯하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고사기』, 『일본서기』, 『고금화가집』, 『화한삼재도회』 등 왕인에 관한 일본 측 자료를 직접 섭렵하고 나름대로 사료비판을 거쳐 그것을 정리해 체계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왕인에 관한 정보의 양이나 질의 면에서 통신사들의 사행록에 비해 크게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덕무의 왕인에 관한 정보 중 특기할만한 점을 정리하면, 왕인이 천가문(天家文, 천자문과 같음)을 가지고 도일했다는 점, 한고제의 후예로 '난파진가'를 지어 인덕천황의 보조를 칭송하니 가부(歌父)라 일컫게 되었고(이상은 『청비록』), 관상을 잘 보아 오하사자기노미고도(大雀命)가 왕이 될 것을 미리 알아 예언했다는 점, 왕인이 가르친 왕자의 이름을 토도아, 토도치 등으로 부정확하게 표기하던 것을 우지노와기이라쓰고라 정확하게 부르고 있으며, 지금까지 문사, 문인, 왕자, 황태자 등 다양하게 부르던 왕인의 칭호를 박사로 바꾸고, 왕인 이후 6세기에 이르기까지 백제로부터 다양한 박사와 기술자가 도일해 새로운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고대국가(河內政權) 형성에 도래인들이 크게 기여한 점을 지적한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
한치윤은 일본에서 간행된 여러 책들을 참고해 1814년 『해동역사』 원편을 출간한다. 9년 후에 그의 조카 한진서가 지리편을 보완함으로써 『해동역사』는 완성된 것이다. 『해동역사』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왕인 관계 저서 중에서 가장 내용이 풍부하다. 한치윤이 백제의 인물로서 자신의 저서에 왕인전을 실은 것은, 왕인이 일본에서 학문을 창시해 일본의 유종(儒宗)이 된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서적을 전한 것은 진손왕 대로부터 시작되었고, 유교가 일어난 것은 왕인에게서 시작되었는바, 기용(器用)이나 공기(工伎)에 이르기까지 모두 백제로부터 전수받았다'고 밝힘으로써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에서의 왕인박사와 그와 동행한 도래인의 공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다. 이 밖에도 한치윤은 일본의 저서 등에 보이는 왕인관계 기사의 오류를 밝히고 있는 바,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해동역사』를 재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서예가로 평가하고 있는 김정희는 고증학자이기도하다. 그는 1868년에 간행된 그의 문집에서, 일본에서의 문자(漢字)의 기원은 왕인이, 書(가명)의 제정은 황비가 했다고 기술했다. 왕인은 그저 일본에 문자(漢字)를 전해주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오늘날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문자의 제정을 창시한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밖에 18~19세기 후반까지의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왕인 인식은 한치윤이나 김정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면 일본에서의 왕인인식은 어떠했으며 어떻게 변해 온 것일까? 일본에서는 5세기말 이후 18세기 초까지는 문수(文首), 서수(書首), 혹은 가부(歌父)로 추앙 받아, 일본의 4대 성현중의 한분으로 존경받던 왕인박사가 19세기말,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때로는 조공품처럼, 때로는 투항한 귀화인 취급을 받아 오다가, 중일전쟁 이후 제2차 대전의 종말까지 내선일체(內鮮一體論),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상징으로 변질, 표면상으로는 존숭의 념(念)을 나타내지만, 내심은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일본에서의 왕인인식은 일관되지 않고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꾸 변해 왔다. 그렇게 자꾸 변하는 중요한 이유는 8세기 초,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라 일컬어지는 『일본서기』가 이른바 소중화사상에 기한 번국사관을 바탕으로 편찬된 데서 연유한다. 또 시대 상황에 따라 왕인에 대한 인식은 변해 존경과 멸시의 염이 뒤바뀐다. 마침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 연대론이 대두하자 국학사상을 신도화(神道化)한 존왕사상이 보편화되면서부터 왕인은 내선일체론, 내선동조론의 상징으로 다시 격상된 바 있었다. 하지만 해방 후, 오늘날은 '왕인 지우기'가 대다수 일본인들의 의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 '남용익의 통신사행을 통하여 본 왕인'
엽문소견 통해『해동제국기』오류 수정 왕인행적 수록
왕인은 백제에서 왜로 건너간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처음 등장한다. 일본에서는 이른 시기 등장한 왕인이지만 우리 쪽 기록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왕인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 기록은 남용익의 『부상록』에 있는 「문견별록」으로 알려져 있고, 그 이후 신유한의 『해유록』, 조엄의 『해사일기』, 원중거의 『화국지』 등의 사행록에도 등장한다. 이후 이덕무의 『청비록』과 『청령국지』,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더 자세히 기재되었다.
1655년 을미사행은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통신사였다. 닛코까지 간 마지막 사행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뿐 아니라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사당 대유원에서의 치제까지 이루어진 사행이었다. 남용익은 종사관으로 사행에 참여했다. 남용익의 「문견별록」의 독특한 점은 이전 사행록에 보이는 문견록과는 달리 항목을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래의 목적은 왕에게 보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용익은 1655년 사행원이 일본인과 만나는 과정에서 일본 역사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남용익 스스로도 "렵문소견하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문헌무징'의 상황에서 사람을 통한 견문의 수집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문사와의 필담창화는 1682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후로 회를 거듭할수록 활발해졌다. 1655년 일본인과의 만남을 기록한 필담창화집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현재 2종의 필담창화집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종은 『조선삼관사수화』로, 정사 조형, 부사 유창, 종사관 남용익과 이테이안의 윤번승 구암중달(九巖中達), 무원소백(茂源紹柏)이 주고받은 시문을 편집한 것이다. 이들은 쓰시마에서부터 일정을 같이 하였으므로 도중에 시를 주고받을 기회도 많았다. 다른 한 종은 『한사증답일록』이다. 린케(林家)의 인물들이 1643년과 1655년 두 차례 사행에 나눈 필담과 창화시를 편집한 것이다. 후집에 실린 1655년 필담창화에는 하야시 가호, 하야시 바이도, 히토미 지쿠도, 사카이 하쿠겐 등이 등장한다.
필담을 나눌만한 인물이 많지 않았던 1655년 통신사행의 상황에서 일본 역사에 관한 지식은 주로 린케와 접하면서 습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왜황대서에 관한 질문이 먼저 호행승이었던 무원에게 갔으나 다시 하야시 가호에게 전달된 것도, 린케가 지식의 담당자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통신사행에서는 오산 승려를 제외한다면 린케에서 통신사의 접대를 전담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린케는 막부의 역사 편찬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일본의 정통성을 유교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어용학자이기는 하였으나 일본 역사서를 가장 많이 섭렵하고 연구한 학자이기도 하였다. 라잔의 문집에 왕인과 백제인에 대한 기술이 발견되는 것도 이러한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655년에는 라잔에게 수학한 아들 가호가 통신사가 일본 역사에 관한 정보를 얻는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헌을 입수하는 것뿐 아니라 필담과 창화를 나누는 사이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따라서 라잔도 관심을 갖고 소전을 기술할 정도였던 백제인 왕인의 이름이 이명빈을 통해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도 라잔이 통신사를 접대하였는데 남용익의 사행록에서 처음 왕인의 이름이 발견된 까닭은 무엇일까? 『해동제국기』의 오류를 수정하고 이후 역사를 더 보충하려는 남용익의 노력에서 기인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명빈은 이전 사행과 달리 호행승 무원과 하야시 가호에게 여러 차례 일본 역사에 관한 질문을 하고 역사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사행이 거듭되면서 에도시대에 맞는 「문견잡록」을 작성할 필요성이 조선에서도 제기되었고 남용익 등의 을미통신사 사신들은 적극적으로 이 임무를 실행했던 것이다.
■ 왕인박사 기록 데이터베이스 편찬의 필요성과 그 방안
국내외 흩어진 왕인 관련 기록 데이터베이스 편찬해야
왕인박사유적지를 관리하는 영암군 문화시설사업소 홈페이지에 왕인박사 소개 항목이 있는데, "18세 때 오경박사에 등용, 32세 때 일본국 초청으로 도일"했다고 소개했지만, 생몰연도를 밝히지 않고 있다. '문산재와 왕인'에서는 "박사 왕인은 백제 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 28년(373년) 3월 3일 월나군(月奈郡) 이림(爾林)의 성기동(聖基洞)에서 왕순(王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고 출생연도를 밝힌 것은 일본 기록을 근거로 역산한 것이다.
일본에서 왕인에 관한 기록은 8세기에 완성된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부터 보이지만, 한국에서는 같은 시기를 다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학자 가운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영암군」 편에 보이는 산천(山川)조 김극기의 월출산 시에서 상사(相師)나 포옹(逋翁)을 왕인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 왕인 전설의 실마리도 잡히지 않는 고려 시기의 전후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이를 왕인 박사로 해석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목판본을 오래 사용하다 보니 이옹(邇翁)의 '이(邇)'자가 문드러져서 '포(逋)'자로 보이는데, 이(邇)자는 왕인의 이름 화이(和邇)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려면 두 단계의 비약이 따른다. 포옹(逋翁, 숨어 사는 늙은이)이라고 글자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 시는 김극기가 월출산에 숨어 사는 친구 이징군에게 지어준 시이기 때문이다. 김극기의 문집이 전하지 않는데다가, 『동문선』에 실린 김극기의 작품 78편 가운데에도 이 시가 실려 있지 않으므로, 이 시의 제목이 무엇인지, 이징군이 누구인지, 과연 포옹(逋翁)이 아니라 이옹(邇翁)인지, 혹시라도 다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현재까지 밝혀진 문헌만으로는 왕인과 영암군의 연결고리를 명쾌하게 확정짓기 어려우므로, 이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들이 더 발견되기를 기대한다. 따라서 오늘 발표에서는 지금까지 찾아낸 기록들을 데이터베이스로 편찬해 왕인과 영암군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왕인에 관한 기록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백제 출신의 왕인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왕인이 영암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적을 속 시원하게 기록한 국내 기록을 아직은 찾아내지 못했다. 왕인에 관한 연구 성과가 그 동안 다양하게 축적되어있다.
박사 왕인이 영암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1936년에 간행된 『조선환여승람』 명소(名所)조에 비로소 처음으로 보인다. 조선환여승람은 지역 유림들과 보고원의 협조를 바탕으로, 독립적인 군 단위의 책들을 하나의 체재 안에 묶는 출판 방식을 통해, 전통시기의 관찬서의 편찬 명분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개별 군의 정보를 상세히 담아 주요 구매층인 지역 유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상업 출판물로서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이병연이 어떤 문헌을 근거로 박사 왕인이 영암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역 유림이나 보고원이 보내온 기록을 바탕으로 출판했을 것이다. 지역 유림이나 보고원들은 현지의 전설이나 향토 문헌을 근거로 보고서를 제출했을 텐데, 영암 보고원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 이 자료를 찾는 것이 왕인 연구에 있어서 앞으로의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박사 왕인에 관한 기록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이래, 통신사와 실학자들에 의해 계속 언급되었다. 신숙주는 서장관으로 파견되었으므로 문견별록을 상세하게 기록했는데, 이후에 파견된 통신사의 서장관들이 그의 문견별록을 계속 수정 보완하여 베껴 썼다. 우리나라에서 왜황(倭皇)의 연대표를 가장 먼저 작성한 문헌이 『해동제국기』였으므로, 후대 문헌이나 사행록에서 이 기록을 인용했다. 사행록은 대체로 일기체였으므로 문견별록을 따로 작성하면서 『해동제국기』를 인용했다.
1655년 을미사행은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통신사였는데, 서장관인 남용익이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왜황대서」를 보태고 줄이는 과정에서 왕인(王仁)의 이름을 밝혔다. 남용익이 『부상록』에서 박사 왕인을 소개하자. 이후에 파견되는 통신사 사행원들에게는 왕인이 화두가 된다.
일본에 한자를 전해준 왕인에 관한 기록이라면 정보를 교환하는 필담에 자주 보이는데, 12차에 걸쳐 파견된 통신사 사행원들의 필담 창화 기록이 너무 방대해 모두 소개할 수가 없다. 남용익이 파견된 1655년 통신사 사행원의 필담을 예로 든다면, 『한사증답일록』에서 왕인의 기록이 처음 소개된 일본 역사서들을 구입하려는 이명빈의 시도가 확인된다.
메이지시대에도 왕인에 대한 관심은 계속 되는데, 이 시대는 왕인의 영암 출생설을 기록한 『조선환여승람』을 출판한 시대와 가깝기 때문에 이 시대의 기록을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필자가 확인한 메이지시대 수신사나 조사시찰단 수행원이 왕인에 관해 기록한 것은 7종이다. 5년 9월부터 3년 동안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신사 및 조사시찰단 기록의 데이터베이스를 편찬했다. 수신사 기록 데이터베이스 편찬의 필요성과 그 방법은 글자 그대로 왕인 기록 데이터베이스 편찬의 필요성과 방법이기도 하다. 영암군에서 20년 넘게 축적해온 왕인 연구의 성과와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왕인 기록도 이제 데이터베이스로 편찬할 시점에 온 것이다.
영암군은 1997년부터 20년 넘게 왕인문화축제를 개최해, 학술대회에서 방대한 분량의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그러나 왕인 박사에 관한 기록은 국내외에 흩어져 있어,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연구성과와 관련 기록을 데이터베이스로 편찬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왕인 연구의 베이스 캠프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
'2019년 왕인문화축제' 홈페이지에 많은 방문객이 찾아들고, '영암군 문화시설사업소' 홈페이지에도 왕인박사 연구 자료가 제공되지만, 본격적인 연구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천년 넘게 기록되고 전승되어 온 '왕인박사 기록'을 집대성하여 검색하기 좋은 상태로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공개가 되어야 한다. 종이책의 한계를 넘어, 일본 학자와 시민들까지 영암군 왕인 박사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게 되면 왕인 박사가 꿈꾸었던 한일문화교류가 한걸음 앞으로 진전될 것이다.
왕인 박사 데이터베이스가 편찬되면, 구글에서 '왕인 기록'이라는 글자만 입력해도 곧바로 영암군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될 것이다. 데이터베이스는 종이책과 달라서 잘못된 내용도 곧바로 수정할 수 있으며, 외국인들도 가상전시관에 들어와 왕인 박사의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다. 번역뿐만 아니라 원문 기록도 함께 편찬하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도 인터넷 공간에 들어와 우리나라 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할 수 있다. 왕인 관련 기록 데이터베이스 편찬을 왕인 박사의 고향 영암군에 제안한다.
■ '조선 통신사와 왕인박사의 만남'
남용익의 왕인박사 정보의 접점은 일본 고전과의 접촉
17세기 이래로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기로 결정이 나면 그때마다 일본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미리 공부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그 전에 일본을 다녀왔던 통신사가 남긴 사행록이 일본에 관한 상세하면서도 유익한 견문록이자 학습서였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연도가 다른 사행록인데도 서로 유사한 표현이 종종 보인다는 것은 앞선 사행록이 그 뒤에 가는 통신사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와 일본인이 서로 직접 접촉하는 것은 처음부터 한정적이었으며, 더구나 그러한 기회에 대해 활자로 옮겨 적은 기록은 매우 드물다. 남용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왕인박사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해서 얻었는지, 그 접점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사료가 현재 확인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이 큰 접점은 교토와 오사카 등지에서 왕인박사와 관련된 일본의 고전(古典)이다. 즉 남용익의 왕인박사 정보의 접점은 일본 고전과의 접촉이었고, 그 구체적인 가능성은 교토에서 유포되었던 간본인 『일본서기』와의 접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과 조선을 연결하는 여러 회로(回路)의 하나로서 일본의 고전(古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조선 통신사의 여정과 경제·문화사적 의의'
통신사 왕래 통한 일본과의 외교는 문화교류 확대효과
조선시대 통신사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는 2017년 10월 말 제13차 회의에서 통신사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했다. 등재 신청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공동으로 했다. 총 111건(333점)이 등재되었는데 그 중 한국 측 63건(124점) 일본 측 48건(209점)이었다. 이로써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국내외에서 높아지고 있다.
조선 국왕이 일본의 막부 쇼군에 파견한 외교사절을 통신사라 불렀다. 이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통신사 기록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 에도 막부의 초청으로 총 12회에 걸쳐 조선국에서 일본국으로 파견되었던 외교 사절단에 관한 자료를 총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 통신사란 16세기 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뒤 단절되어 있었던 국교를 회복하고, 양국이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외교 기록, 여정 기록, 문화 교류의 기록으로 구성된 종합 자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선 통신사 기록물에는 비참한 전쟁을 경험한 양국이 평화로운 시대를 구축하고 유지해 가는 방법과 지혜가 응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조선 국왕이 일본 막부에 파견한 외교 사절이라고 한다면, 이와 반대로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조선 국왕에게 보낸 외교 사절을 가리켜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부른다. 일본의 1867년 왕정복고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텐노(天皇)가 조선 국왕처럼 최고 위치에 있었지만, 정치적 실권은 막부의 쇼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 국왕과 일본 막부 쇼군 사이에 외교 사절을 교환했는데, 조선 국왕이 일본으로 파견한 대일 외교 사절을 통신사라 하고, 일본 막부 쇼군이 조선으로 보낸 대 조선 외교 사절을 일본국왕사라 칭했다.
조선 정부가 일본 막부에 파견한 통신사의 임무는 조선 국왕의 외교문서인 국서를 막부의 쇼군에 전달하고, 그 회답으로 쇼군 명의의 국서를 받아오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통신사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그것은 외교사행(外交使行)임에 틀림이 없다. 다시 말해서 조선통신사가 양국 간 경제교류를 확대한다든가, 아니면 문화교류를 증진한다든가 하는 것을 양국 정부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일 그러한 것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통신사 왕래의 결과로 얻어지는 부수적인 효과였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통신사 외교가 되풀이 되면서 문화 교류에 대한 욕구가 갈수록 커졌다고 볼 수 있다.
통신사 외교를 전개하는 동안에는 양국민이 재화를 사고팔지 못하도록 교역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교환이 허용된 것은 오로지 예물뿐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통신사 외교를 통해서 사후적으로 혹은 사전적으로 양국 간 무역과 관련된 교섭이 진행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본 측이 조선에서 수입해 가는 조선산 인삼이라든가, 그와 반대로 조선 측이 일본에서 수입해 오는 일본산 구리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외교 측면에서 양국이 성신과 교린을 강조했다고 한다면, 경제 측면에서는 양국이 유무상통(有無相通) 즉 교역(交易)을 기본 이념으로 내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통신사 왕래를 통한 조선과 일본의 외교는 문화 교류를 확대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