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읍의 동쪽에 남평 문씨의 세거지인 장암마을이 있다. 남평 문씨는 연촌 최덕지의 외손녀 사위인 문맹화가 영암 영보에 입향하고, 그 증손자 익현이 장암으로 이거, 정착하였다. 이 마을 대동계에서 건립한 장암정(場巖亭)은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동계(洞契)의 집회소이다. 최근 이 마을 대동계의 300년 동안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한 회계장부 용하기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국내외의 경제사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장암 용하기는 서양에서만 사용하였다는 복식부기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경제상황의 변천사와 세계경제사학 연구에도 중요한 국보급 자료이다. 더구나 장암마을 용하기는 복식부기의 요건을 갖춘 국내최고의 기록으로 알려진 1798년부터 22년 동안의 북한 소장의 사개장부를 연대에서 57년 앞설 뿐만 아니라, 1741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3백여 년 동안의 기록으로 조선후기 경제사(經濟史)가 함축되어 있는 대단한 자료다.
세계 회계학계에서는 이탈리아 루카 파치올리가 1494년에 저술한 ‘산술, 기하, 비 및 비례총감’을 복식부기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입증자료는 단편적이고 완전한 회계장부의 형태로는 남아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장암용하기 같은 국내의 회계장부를 발굴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할 경우 우리나라가 복식부기 최고(最古)자료의 보유국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학계에서는 장암마을의 용하기를 경주최씨 문중의 용산서원 전여기, 경주 옥산서원의 회계록, 서울 육주비전의 회계록 등과 비교한 결과 복식부기의 형식을 갖춘 기록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자료로 보고 있다. 이 엄청난 기록이 국가나 관청인 아닌 일개 시골마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자 경이로움이다.
이렇게 소중한 장암마을 용하기는 우리의 무관심으로 보관에도 많은 애로가 있다고 한다. 시급히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근거로 장암에 이른바 회계 박물관을 세우는 등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널리 알리는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영암은 아직도 씨족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는 고장이다. 그리하여 유서 깊은 마을들은 구림처럼 마을 대동계를 중심으로 나름대로 특색 있는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영암 덕진면에는 연촌 최덕지가 은퇴 후에 정착하여 학문에 정진한 영보리(永保里)리가 있다. 영보리는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가 인척을 이루어 살면서 영보정 동계를 만들고 영보정(永保亭)을 건립하였다. 이 마을의 풍상을 지켜본 영보정 앞의 멋진 소나무가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고사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마을에 있는 영보정 동계자료는 조선 후기 영암 향촌사회의 생생한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영보에는 보물 594호인 최덕지 영정과 유지초본(영정을 비단에 그리기 전 먼저 기름종이에 그린 그림)이 있다. 현전하는 대다수 초본이 안면이나 가슴이상의 크기인데 반해 연촌 유지초본은 정본 크기로 그 희소성에 정본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보리는 지금도 매년 5월 5일 단오절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풍향제가 열리고 있다. 이 날에는 현지 마을 사람은 물론 출향인들도 모두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는데, 아마도 전국제일의 마을단위 축제일 것이다.
영암 신북면에는 조선 초기 청백리인 하정 류관이 그곳의 지세와 경관에 반해 아들 맹문에게 건립하게 한 영팔정(詠八亭)이 있는 모산리(茅山里)가 있다. 이 정자는 모정(茅亭)이라 칭하다 훗날 율곡 이이, 제봉 고경명 등이 류관의 학덕을 기리면서 주변경관을 팔경시(八景詩, 8편으로 주변경관을 노래한 연작시)로 읊었다 하여 영팔정이라 하였다. 모산리는 지금은 문화 류씨 집성촌이지만 예전에는 하동 정씨, 경주 이씨 등도 함께 살았다. 모산리는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촌으로 이름이 높았고, 현전하는 모산동약(茅山洞約)은 향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모산리는 농수산식품부가 주관한 제1회 행복마을 콘테스트 경관, 환경 분야에서 은상을 수상하여 현재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영암읍 망호리(望湖里)는 경주 이씨 집성촌으로 익제 이제현의 후손 이반기(李磻琦)가 처음 입촌하여 영암의 유력 가문이 되었다. 망호정은 영암의 명망 있는 가문이지만 특이하게 참빗으로 유명하다. 망호리 참빗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품이었고, 지금도 그 명맥을 장인정신으로 이어가고 있다.
필자가 망호리 참빗을 소개한 이유는 망호정 경주 이씨가 소위 지역의 반상의 명문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참빗을 빗은 그 투철한 상무정신(常務精神)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 때문인지 현재도 망호리는 영암지방에서 친환경 농법을 가장 먼저 도입하는 등 생활 속에서 여전히 상무정신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사례로 귀감이 되고 있는 마을이다.
이렇게 아직도 우리 영암에는 우리 조상들의 찬란한 문화가 오롯이 남아 있다. 이는 우리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선사하지만 반면에 동시에 전승과 보존이라는 숙제를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구림마을의 대동계 문서에 대한 유네스코 기록 문화유산 등재에 장암의 대동계의 용하기는 물론 영보정과 모산리 그리고 망호정에 남아 있는 대동계 문서를 일괄하여 신청하는 방안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구림에는 군립 하(河)미술관이 있다. 최근에 개관한 하 미술관은 영암 출신 동강 하정웅 선생이 3천5백점의 엄청난 미술품을 영암군에 기증하여 이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하 미술관은 군 단위에서는 소재가 드문 1종 미술관이라 한다. 영암군의 문화적 위상을 알릴 수 있는 소중한 공간임에도 홍보부족과 지역사회의 관심소홀로 아직 군민들의 친숙한 문화공간으로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낮은 수준의 문화적 소양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다. 영암인은 물론 우리 모두의 애정 어린 관심이 필요하다 하겠다.
악성 김창조, 월출산 氣 가야금 산조에 담다
산조(散調)는 흩어진 가락, 허튼 가락으로 정악에 대비되는 개념이나, 일반적으로 국악에서 장구를 반주로 연주하는 가야금, 거문고, 대금 등 기악독주를 말한다. 산조는 보통 진양조로 느리게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빠르게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바뀌어 가며 연주된다. 산조는 이러한 긴장과 이완의 반복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뛰어난 형식미와 음악적 표현력을 갖춘 아름다운 음악이다. 산조의 음악적 기조는 우리의 전통 장단과 어우러져 우리 민족적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장르로 알려져 있다. 산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판소리 기원설과 시나위 기원설이 있으나 필자는 판소리의 정서에 시나위의 음악형식이 가미된 것이라고 본다. 산조는 가야금을 시작으로 거문고, 대금, 해금 등 다른 악기로 영역을 넓혀가며 발달하였다. 가야금산조는 국악연주에서 보조악기로 사용되던 가야금을 독립시켜 가야금 연주만으로 독창적 음악형식을 개척하여 가야금 산조라는 국악 기악계의 새 지평을 열고, 국악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국악사에 길이 빛날 가야금 산조는 영암 출신 악성 김창조가 창시하였다. 김창조의 가야금 산조는 구 한 말의 사회적 혼란과 외세의 침입에 맞선 동학농민운동을 배경으로 19세기 말의 민중의 정서를 섬세함과 격렬함의 예술적 형상으로 승화시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김창조의 예술혼은 영암의 월출산을 닮았다. 그래서 혹자는 김창조의 가야금 산조는 월출산의 기기묘묘함을 형상화 시킨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김창조 선생은 인간정신을 가야금 산조의 가락에 삼라만상의 조화를 긴장과 이완으로 대비하여 형상화하여 찬란한 예술로 승화시켰다. 김창조의 가야금 산조는 다양한 유파로 발전하였고 국악계 전반의 다른 기악으로 산조의 폭을 넓혀 나갔다.
선생이 탄생한 영암 월출산 자락에는 선생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이에 영암군에서는 선생의 위대한 예술혼을 기리고자 영암이 산조의 본향임을 선포하고 선생의 탄생지인 영암읍 회문리에 가야금 테마공원을 조성하고, 매년 10월에 가야금 산조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가야금 산조의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문화재청과 보조를 맞추는 등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선생을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가야금테마공원 옆에는 월출산 천연계곡과 암반수를 이용하여 만든 물놀이 시설인 氣찬랜드가 조성되어 있다. 氣찬랜드에는 다양한 규모의 풀장과 실내 물놀이장이 잘 갖추어져 가족단위의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다. 김창조 선생의 유적지와 겹쳐 소중한 문화유산의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 만큼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향으로 지혜를 모아 영암의 대표 유원지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