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일에 생각나는 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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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일에 생각나는 시인들

정찬열 군서면 도장리 출신 미국 영암군 홍보대사
국치일이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했다. 그로부터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배를 겪어내야만 했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날 8월 29일이 바로 ‘경술국치’날이다.
한일합방 후 일제가 맨 처음 한 일은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다는 일이었다. 백의민족의 자존심을 일시에 뭉개버리자는 의도였다. 문 앞에 열십자로 내걸린 일장기는 지금도 사진으로 남아있다.
이 조약 체결 직후 황현, 한규설, 이상설 등 많은 사람이 극렬한 투쟁을 했다. 당시 14만 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해방을 맞을 때까지 우리 선조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국권 회복을 위해 싸워나갔다.
일제는 한 손에 총칼을 들고 겁박하며 한편으로는 문화정책으로 회유하며 한국인을 통치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의 횃불을 밝혀 들불처럼 번져갔다. 무저항 비폭력 운동은 일제의 총칼 앞에 사정없이 짓밟혔다. 사망 7천5백. 부상 4만5천. 체포 5만여 명에 달했다. 횃불은 타는 동안만 횃불이다. 다시 암흑이 오고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씨가 남아있었다.
시인들이 입을 열었다.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용운은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절규했다. 심훈은 “그날이 오면,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라고 해방의 날을 기렸다. 이상화는 “뻬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고 아픔을 전했다.
아, 윤동주. “육첩방은 남의 나라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고 썼다. 이 시를 발표한 후,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그는 생체실험의 아바타가 되어 매일 정체모를 주사를 맞았고, 결국 뜻 모를 비명을 지르면서 1945년 2월 16일 스물여덟 푸른 나이로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반면에 이런 시도 있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자랑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서정주가 쓴 ‘마쓰이 히데오 오장(伍長) 송가(頌歌)’. 조선 청년들에게 가미가제특공대 지원을 독려하는 시이다. 이광수, 주요한, 모윤숙, 유치환, 김동환 등이 이쪽 반열에 오른 문인들이다.
촛불 또한 타오르는 동안만 촛불이다. 언제든 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촛불로 점화된 횃불은 꺼지지 않고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대를 이어 전승된 불이었다. 광복의 그날까지 불길은 그치지 않고 타올랐다.
국치일(國恥日). 109년 전의 일이다. 백년도 넘은 그 날이 손톱 밑의 가시처럼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요즈음 일본 하는 짓이 심상찮다. 정신 차려야 한다.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했던 선조들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이 아침, 다시 한 번 새겨보는 말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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