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 소설로 환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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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 소설로 환생하다!

이영현 작가(도포면장), '바람벽에 쓴 시-달사는 어디로 갔나' 출간

영암 의병대의 출정, 주요 격전지, 영암성 등 현장묘사들 흥미진진

영암 출신의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가 소설로 환생했다.
작가는 도포면장으로 재직중인 이영현(필명 이영돈)씨. 1989년 문학사상사 신인상을 받고 전업 소설가로 활동하다가 재능과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뒤늦게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씨는 올해를 끝으로 30여년 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면서 본업으로 돌아갈 작정이다.
그동안 제2의 인생을 준비하듯이 작년 하반기부터 틈틈이 집필을 시작, 이번에 내놓은 작품이 지난 11월 25일 출간된 '바람벽에 쓴 시-달사는 어디로 갔나'이다. 평소 고향인 영암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작가는 1555년 5월 을묘왜변 당시 의병을 일으켜 6천여 왜구를 물리친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를 주인공으로 역사소설을 펴내게 된 것이다.
을묘왜변은 1555년 5월 11일 6천여 왜구가 7천여척의 배를 끌고 달량성(현 해남 남창)에 침입한 왜변이다. 임진왜란 37년 전에 발생한 을묘왜변으로 강진, 병영, 장흥 등 10여개 성이 잇달아 함락되고 전라병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이 전사한 데 이어, 영암군수 이덕견이 항복하는 등 왜구의 파죽공세에 조정과 전라도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의병을 일으켜 5월 25일 펼쳐진 영암성 주변의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친 이가 바로 양달사다. 을묘왜변으로 500여명이 사망했다고 실록에 기록돼 있지만, 당시의 치열했던 전황을 놓고 생각해 보면 적어도 사망자가 5천명이 넘고, 납치된 부녀자도 수천명이 넘을 것이라는 게 작가의 추측이다.
하지만 을묘왜변이 끝나고 조정의 논공행상에서 의병장이었다는 이유 때문인지 양달사의 공적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그의 공적을 삭제하고 숨기다 보니 영암성 주변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접전 장면이나 병사를 이끌고 전투에 앞장선 장수가 조선왕조실록에는 제대로 기록돼 있지 않다. 명종실록과 연려실기술, 당시 전쟁을 지휘한 도순찰사나 방어사, 영암에 내려와 있던 전주부윤 이윤경 등의 기록을 블록 맞추기처럼 아귀를 맞춰 봐도 도대체 누가 어떻게 영암성 앞 향교에 주둔한 왜구를 격퇴하였는지 상세한 기록이 없다.
그러다 보니 당시 전라도 민심은 들끓게 되었고, 조정의 논공행상을 개탄하는 시가 장흥부의 바람벽에 나붙게 된다. 사관들 중 누군가가 당시 영의정이었던 도순찰사 이준경의 시퍼런 서슬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에서 수집한 장흥부 바람벽의 싯귀를 명종실록에 삽입했고, 그 중 한 구절이 바로 소설의 제목이 된 '달사는 어디로 갔나(有功達泗歸何處)'이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는 법, 전라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기록은 여지도서와 호남절의록 등은 물론, 영암군청 앞의 장독샘 전설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게 되고, 조선 헌종 때에 이르러서는 조정에서도 결국 양달사를 좌승지로, 양달사의 형 양달수를 사헌부 지평으로 추증하게 된다.
작가의 말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이 소설은 공이 있는 달사를 찾기 위한 소설적 규명작업으로, 일부 허구적인 인물과 지역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 의병대의 훈련장과 영암의 주요 격전지, 그리고 영암성과 동헌, 영암객사, 영암향교, 영보역 등 역사적인 무대와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덕진다리와 추더리 등의 지명 유래 등은 독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작가 李永鉉(필명 李永敦)은 1961년 영암 출생으로 1989년 문학사상사 신인발굴 소설부문에 단편 '수렁은 마르지 않는다'로 당선됐으며, 1992년 제42회 MBC 베스트셀러극장에 '수렁은 마르지 않는다'가 방영되기도 했다. 주요작품은 '수렁은 마르지 않는다', '차가운 밤', '도둑고양이', '논' 등이 있다. 책 주문 연락처는 전화(010-9883-5451)로 하면 되며, 서점에는 12월부터 배포예정이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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