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도갑사(道岬寺)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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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③도갑사(道岬寺)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역사

'부연(婦椽)'설화 전해지는 최초의 부연식(附延式) 지붕 건물

도갑사 대웅보전 중창불사 기공식(2006년)
월출산 도갑사(道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다. 신라 말 국사 도선(道詵)이 창건했다.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도선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도갑사 해탈문(解脫門)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도갑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197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계기로 전반적인 발굴 및 보수 작업이 이뤄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현재 도갑사의 위상을 만든 장본인인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 동국선원 회주 월우 스님의 회고담이 재미있다.
도갑사 대웅보전 중창불사 기공식(2006년)
월우 스님에 따르면 도갑사는 880년 통일신라시대 도선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조선 초기인 1456년에는 전각과 요사채가 966칸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 그러나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됐고, 1977년에는 참배객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해 대웅보전마저 전소됐다.
월우 스님은 2015년 <영암군민신문>과의 특별인터뷰를 통해 “도갑사 주지로 부임해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치르고 둘러보니 도량정비가 너무 안 되어 있었고, 특히 대웅전을 그대로 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해탈문이 국보여서 그 500m 내에서는 신축 등이 불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일단 유구 조사부터 해 보아야겠다 싶어 목포대 박물관 이영무 교수에게 대웅전 일대 땅을 파보자고 했다. 발굴조사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땅을 파다보니 계단석이 나왔고, 그 길로 당시 김철호 군수에게 대웅전을 새로 짓자고 했다”고 대웅보전 중창사업의 역사를 설명했다.
월우 스님은 도갑사 대웅전에 전해져온 ‘부연(婦椽)’설화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도갑사 대웅보전
“도갑사 대웅보전을 신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게 건립하라는 왕명을 받은 대목(大木)이 이를 필생의 작업으로 삼아 온 정성을 다해 나무를 깎고 다듬었답니다. 젊은 목수들의 도움도 마다하고 직접 500개의 서까래를 다 깎은 대목은 이를 낱낱이 자로 재던 중 깊은 시름에 빠졌다고 해요. 재고 또 재보았으나 깎은 서까래가 도면보다 짧게 끊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망한 노인은 자리에 눕고 말았는데, 이를 지켜본 며느리가 하는 말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답니다. “짧은 서까래에 다른 서까래를 겹치면 더 웅장하고 튼튼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며느리의 지혜로 세워진 도갑사 대웅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연식(附延式) 지붕 건물이 되었고, 부연된 서까래는 며느리가 도와서 선 서까래라는 뜻으로 부연(婦延)이라고도 합니다.”
도갑사 대웅보전(현재)
월우 스님은 특히 도갑사 대웅전이 오늘날의 대웅보전이 된데 대해 “주지로 부임해 대웅전을 복원하기로 하고 우여곡절 끝에 1층 허가는 떨어졌는데, 영남대학교 교수 한분이 고려시대 때 ‘중층’으로 된 법당도 있었다고 얘기했다. 부연식 지붕인 대웅보전은 중층이 더 어울리겠다 싶었고, 따라서 이왕이면 중층으로 복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길로 문화재위원들에게 이왕 대웅전을 다시 짓기로 했으니 2층으로 가야 한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자고 우겼다. 김철호 군수는 한 층도 어려운데 한 층을 더 올리자는 것이냐며 호탕하게 웃었다. 문화재위원들의 결사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박태홍 문화관광과장을 비롯한 공직자들과 함께 많은 노력을 했다. 오늘날 역사적인 도량이 만들어진 계기다”고 술회했다.
/ 사진제공 = 영암군청 홍보팀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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