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왕인박사현창협회가 주최하고 왕인문화연구소가 주관한 이번 학술대회 주제는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의 배경’으로, 동국대 박남수 교수의 ‘근대 이전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의 배경’, 광주교육대 김덕진 교수의 ‘1920년대 전남유림의 동향과 왕인의 영암 출생설’, 신라대 조명제 교수의 ‘1920~30년대 전남지역 일본불교 정토진종 대곡파의 동향’, 광주여대 정성일 교수의 ‘1930~40년대 왕인박사 상징물 건립 추진’ 등의 주제발표와 청중과의 대화 등이 이어졌다.
동국대 박남수 교수는 ‘근대 이전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의 배경’이란 주제논문을 통해 부정론과 긍정론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이 지닌 문제와 한계점을 지적하고, 왕인의 일본 파견 시기를 칠지도 제작시기와 관련해 살피면서, 왕인을 초치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서기’ 황전별 기사를 분석, 검토함으로써 왕인 도왜(渡倭)의 영암 관련성 여부를 살폈다.
신라대 조명제 교수는 ‘1920~30년대 전남지역 일본불교 정토진종 대곡파의 동향’이란 주제논문을 통해 일본불교가 국가주의의 길로 나아간 것도 사실이지만, 니찌렌계 사상운동은 국가주의와 초국가주의, 우파와 좌파, 민중지향적 것 등 다양한 흐름이 존재했다고 지적하고, 정토진종의 사회사상에도 내셔널리즘과 사회주의 양극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근대불교사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확인하고, 검토하는 작업이 선결 과제임을 강조했다.
광주여대 정성일 교수는 ‘1930~40년대 왕인박사 상징물 건립 추진’이란 주제논문을 통해 ▲1919년 독립 만세 운동 이후 내선융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식민지 지배 정책이 추진되면서, 1920년대 초반부터 고대 인물인 왕인박사를 상징화(형상화)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지역에서 있었고, ▲식민지 관료뿐만 아니라 유학자 등 민간인들도 내선융합 또는 ‘내선일체’의 상징 모델로 고대 인물인 왕인박사를 상징화(형상화)하고자 했으며,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부여의 왕인박사비’ 건립 시도는 미완(未完)으로 끝났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이어 ▲1925년과 1927년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이 그 뒤 언제부터, 특히 1945년 이후 어느 시기부터 다시 부상하게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분명하지 않다는 점, ▲1925년 전후 시기부터 1945년까지 영암 등 전남지역의 유교와 불교 등의 동향, 더 나아가 조선인과 일본인의 활동을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과 관련지어 분석한 실증연구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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