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 경각심 높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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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보 경각심 높여야”

“국가가 있어야 개인이 있어요”


6.·25전쟁 중 전투 참전
수류탄 맞아 파편상 입어
“젊은세대 국방의무 충실해야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은 전쟁의 잔혹성과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젊은 세대들 국가안보에 대한 정신무장이 필요합니다”
6·25전쟁중 국군으로 참전해 사선을 넘나들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6·25참전유공자회 김동욱(83·도포면) 회장은 “매년 6·25기념일이 다가오면 옛 생각이 새로워지고 안보의식에 대해 각성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말했다.

6·25때 충북 음성지구 전투와 강원도 고성·간성지구 전투, 351고지 전투, 춘천 고탄 전투에 참전했던 김 회장은 1950년 7월 11일 치열했던 음성지구 전투에서 수류탄을 맞고 반신 파편상의 부상을 입었다.
바로 옆에 있던 전우를 그 순간 떠나보내야 했던 아픔을 겪었고, 자신은 후송돼 3개월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당시 나이 스물 두살.
1949년 육군 입대, 지리산과 백운산, 여수, 순천 등지에서 공비토벌에 참가하기도 했다. 6·25 발발시 휴가중이었던 김 회장은 27일밤 서둘러 부대로 복귀했다. 소속부대는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5여단 15연대(재편후 5사단 27연대). 김 회장의 부대는 6월 29일밤 한강전선(영등포)에 투입되면서 치열한 전장을 경험했다.
6월 30일 새벽 도강을 해 서울로 진격할 작전이었지만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북한군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며 퇴각할 수 밖에 없었던 참담함을 맛봤다.
“서울까지 이동하느라 부대원들은 모두 지쳐있는 상태였는데 북한군의 기세는 무서웠제…, 순식간에 아군 진지가 점령당하고 우리 기관총을 북한군이 들고 쏘고 있더만,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야했어” 김 회장은 그날의 참담했던 심경을 말했다.
자신이 참전했던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6·25전쟁사에서도 유명한 351고지 전투로 기억했다. 본래 366고지였지만, 대포, 함포사격 등으로 산의 높이가 351m로 낮아져 붙여진 이름이다. 얼마나 많은 전우들의 희생이 따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 회장은 “우리 5사단 전우가 가장 많이 전사했던 전투”라고 밝혔다.
1·4후퇴 때 춘천 고탄 전투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전투에 참전하지는 못했지만 보급담당과 교육담당으로 복무하며 1958년 중위로 제대할 때까지 국가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일관했다.
김 회장은 “우리 6·25참전 유공자들은 이 나이에도 국가가 위태롭다면 당장이라도 총을 들고 나가 싸우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젊은 세대들은 국가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가 있어야 개인이 있는 것입니다. 가끔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젊은 세대들, 안보의식이 결여된 것을 볼때는 통탄스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젊음과 목숨을 바쳐가며 싸워 나라를 지켰던 선배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젊은이들은 국방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교육기관은 안보의식 강화를 위한 교육도 철저히 해야한다”고 말했다.
/변중섭 기자
변중섭 기자 jusb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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