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현 영암학회 회장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소설가 |
표지를 넘기면 일본어로 "본 내용은 소화 4년부터 5년까지의 사실을 기록한다"고 돼 있다. 다음에는 우리 영암군의 연혁이 나오고 이어서 '군세 개요 일람'이 시작된다. 당시 영암군의 면적은 29방리4(1방리는 16㎢) 약 470.4㎢로, 2019년 현재 영암군 면적 612.5㎢와 비교하면 70여 년 만에 30%나 넓어졌다. 행정구역은 11개 면에 121개리. 인구는 내지인(일본인) 189호 665명. 조선인 14,603호에 76,682명, 지나인(중국인) 10호 10명으로 총 77,357명이다. 당시 영암면의 인구는 10,440명인데, 일본인의 절반인 339명이 영암면에서 살았다. 또한 영암군의 논은 일본인이 3,312정(1정=9,917㎡), 조선인이 7,477정을 소유했다. 665명밖에 되지 않은 일본인들이 영암군 논의 절반 가량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주요 산물은 벼와 보리, 콩, 면화 등이고, 공장 9개 중 일본인이 6개를 소유했고, 자동차는 총 7대였다. 교육 현황으로는, 소학교 1개소에 보통학교 9개소, 강습회 1개소에 학생수까지 자세히 기록돼 있다. 당시 서당도 38개나 남아 있었는데, 서당 학생 443명 중에 7명이 여학생이었다는 것도 눈길을 끈다.
공직 현황으로는 군수 1명에 군속 5명(일본인 4명). 면장이 11명이다. 11개 면 중에서 영암, 금정, 신북, 시종, 군서 외 6개 면의 명칭은 조선시대 그대로다. 1998년에 발간된 영암군지 상권(549p~549p)에 1917년 곤일종면이 삼호면이 되었고, 1929년에 북일시면이 덕진면이 되었고, 곤일시면이 미암면으로 되었다는 등의 기록들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1931년(소화 6년) 3월 6일 조선총독부에서 발송한 문건에도 덕진, 도포, 서호, 학산, 미암, 삼호 면민들이 면의 명칭을 변경해 달라고 건의한 이유까지 자세히 기록돼 있으므로 위의 여섯 개 면의 명칭 변경은 1931년에야 이루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이 소책자의 압권은 마지막에 첨부된 영암군 행정지도다. 조선시대 최고의 지도로 평가되는 1872년 회화식 영암군 지도보다 불과 60년 후에 발간된 것임에도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행정지도와 별반 다름이 없다는 점에서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필자가 오늘 이 지지를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 선조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일제시대 영암군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거의 묻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영암학회에서는 오는 9월 16일 출판기념회를 가질 예정인 1953년 「영암군 향토사」에 이어서 2023년에는 이 지지와 당시 일부 영암군 자료들을 모아 가칭 「일제시대 영암군(日帝時代 靈巖郡)」이라는 책자를 발간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삼국사기부터 시작된 영암군 역사서들 중에서 타 시군에 비해 가장 빈약한 일제 강점기와 6·25 전후의 영암군 주요 현황을 군민이면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그래야만 영암군 지명 유래나 의병사, 독립운동사. 성씨 변천사, 나아가 각종 산업이며 예산, 행정의 변천 현황 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다.
8월 15일, 광복 77주년이 지났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날은 광복절이 아니라 다가오는 8월 29일 경술국치일이다. 국치일부터 시작된 36년간의 고통을 잊고 산다면 광복절을 기념할 자격도 없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