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도선국사 문화예술제 ‘도선국사 재조명 학술세미나’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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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도선국사 문화예술제 ‘도선국사 재조명 학술세미나’ 요지

■ ‘도선의 행적과 도갑사 도선·수미비 고찰’ = 이영숙 규남박물관장은 주제발표를 통해 도갑사는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유존되어 오면서 국보와 보물 등 수많은 불교문화재를 지닌 사찰로, 이 가운데 1653년 완성된 ‘도선·수미비’(道詵·守眉碑)는 도갑사의 창건과 중창, 제작 당시의 정치, 사회, 불교사적인 여러 측면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장은 또 신라 말의 승려 도선과 조선 초의 승려 수미를 함께 기린 이 비는 총 높이 513㎝의 조선 최대의 작품이자,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비에는 도선국사의 탄생과 생애, 풍수도참설에 뛰어난 능력과 비보사찰 도갑사의 창건, 도참설이 국리민복과 왕권을 확고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반면 고려시대 최유청이 쓴 도선의 비문과는 그 내용이 상당한 차이가 있어 이는 도선에 관한 내용이 시대 상황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고 이 관장은 해석했다.
비의 제작에는 건립 당시 대군과 정승, 육조당상 등 조선시대 최고의 고관대작과 대표적인 승려들이 대거 참여했고, 비문의 찬술은 이경석, 글씨는 오준이 썼다. 비의 내용과 제작시기, 제작에 동참한 수많은 인물로 미뤄볼 때 비의 제작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고 이 관장은 주장했다.
이 관장은 특히 도선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풍수도참사상’은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고려시대에는 비보사탑설을 중심으로 한 불교적 수용으로,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효 사상과 결합된 음택풍수로 민간에 널리 확산되어 유행했다면서, 조선시대 풍수지리설의 유행은 도선·수미비의 제작에 큰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또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 되면 민심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면서, 17세기에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대군과 대신들이 볼모로 잡혀가는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풍수도참설에 의지해 민심을 수습하고 심리적 안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치·사회적 염원이 비의 제작에 수많은 동참자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임진왜란 이후 폐허화 된 사찰을 중건하고 보존하려는 도갑사 승려들의 노력이 도선·수미비 건립으로 이어졌으며, 비의 내용이 대부분 도선에 관련된 것임에도 ‘道詵·守眉碑’로 비명을 병기한 것은 도갑사가 도선의 비보사찰임과 동시에 조선 초 왕사를 지낸 수미를 널리 알려 도갑사의 중흥을 도모하려 했던 것으로 짐작한다고 지적했다.
■ ‘도갑사의 창건과 중흥’ = 신웅주 조선대 건축학부 교수는 주제발표를 통해 도갑사는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을 거쳐 발전한 후에 고려 전기에 오층석탑, 미륵전, 석조여래좌상 등 지속적인 불사가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고려 말 조선 초 거의 폐사된 도갑사는 조선 왕실의 재정지원을 받아 15세기 중엽에 다시 중창되었고, 해탈문은 1960년 수리 도중 지붕 중앙부의 종도리장혀 상면에서 묵서 상량문이 발견됨에 따라 왕사(王師) 겸 판선종사(判禪宗事)인 수미에 의해 1473년 완성되었음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조선 초 왕실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불사가 이뤄졌던 도갑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되었고, 이후 광해군 때 낡고 허물어진 전각이 새로 증수되어 승려가 730명이나 될 정도로 다시 번성했다. 1633년 6월에는 5년에 걸쳐 ‘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명’이 세워지고, 절 입구에 석교와 ‘월출산도갑사석교중창비’가 세워졌으며, 국사전에 수미대사의 진영이 봉안됐다. 신 교수는 이 같은 불사가 같은 해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당시 도갑사는 상당히 번성했음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근대 이후 도갑사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사세가 많이 약해졌으나, 1981년 대웅전이 복원되는 등 지속적인 복원 불사가 이뤄졌다. 1986년 미륵전과 수선당, 1987년 국사전과 지혜당, 1988년 종각, 1999년 도선국사 성보관 및 명부전, 2000년 도선수미미와 수미왕사비 보호각, 2001년 주차장 및 해탈문 보수, 2002년 도갑사 사적비 건립 등이 이뤄졌다.
특히 2005년 발굴조사를 통해 과거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으로 추정되는 불전이 존재했음이 확인됨에 따라 2009년 중층구조의 대웅보전 낙성식이 이뤄지고, 이후에도 광제루, 종무소, 다각실 등이 건축되어 지금에 이른다.
도선국사 풍수사상은 義湘의 ‘산수비기’ 발전시킨 이론
■ ‘도선국사의 풍수사상’ = 김규순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주제발표를 통해 도선국사가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라고 한 것은 충청도 도사 김일손이 “비보의 설은 실로 도선을 종조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연산군에 올린 상소에 기인한다며, 도선이 우리 풍수의 비조라고 해도 손색이 없지만, 도선 이전에 풍수를 실행한 인물은 의상대사라고 주장했다.
김 수석연구원은 이어 의상은 ‘산수비기’를 저술했다면서, ‘광해군일기’에 허균이 이를 읽어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현종실록’의 윤선도 추고함사에도 ‘산수비기’를 거론하고 있으며,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의상이 ‘산수비기’를 저술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니, 적어도 19세기 후반까지는 ‘산수비기’가 사대부들에 은밀하게 전해지고 있었음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수석연구원은 이에 도선은 의상의 ‘산수비기’를 중심으로 한 불교 풍수를 기반으로 산천순역의 형기론과 음양오행설을 덧붙여 풍수를 발전시켰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도선은 풍수라는 도구를 이용해 고려를 민중을 위한 불국토로 만들기를 염원했고, 그 염원은 평민이었던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왔으며, 불교국가로 성장하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고 김 수석연구원은 지적했다.
도선의 풍수는 곧 부처의 자비사상과 보시사상을 실천하는 하나의 도구로, 자연의 섭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적용되고 운행되는 하나의 틀이므로, 자연 속에서 현실의 이상향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우친다면 풍수의 올바른 이용법을 알 수 있으며, 이의 실행으로 민중을 행복한 삶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김 수석연구원은 도선 풍수는 거시적인 국역풍수로 고려를 지탱하게 했다면서, 고려시대의 풍수는 도선의 바람대로 전 국토를 불국토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불교 풍수를 추구했으나 여전히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도선의 풍수사상은 여전히 우리 생활 깊숙한 곳에서 부처님의 자비가 자연의 섭리를 통해 전달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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