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나오니 바람결이 차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는 새벽이다. 오늘은 쭈비리(Zubiri)까지 갈 예정이다. 22㎞다.
차도를 따라 순례자용 좁은 길이 나 있다. 숲길로 이어진다. 숲속 공기가 싱그럽다. 머잖아 마을이 나온다. 일층과 이층집이 섞여 있는 반듯한 마을이다. 아스팔트길 왼쪽으로 성당이 보인다. 성당 시계탑이 7시50분을 가리키고 있다. 돌로 지은 성당에 푸른 이끼가 끼어있다. 저 성당은 또 몇백 년이나 되었을까.
마을을 지나자 들판이 시작된다. 울타리를 쳐 놓은 넓은 목초지에 대여섯 마리의 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맑던 하늘에 구름이 낀다. 혼자서, 둘이서, 혹은 끼리끼리 길 따라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걸어가면서 서로 얘기를 나누고 각자의 걸음 속도에 따라 또 새로운 사람과 섞여 걷기도 한다. 각국에서 온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며 걸어간다.
모두들 배낭 뒤에 조개껍질을 하나씩 매달았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 성인이 스페인에서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서기 44년 순교를 당했다. 그의 제자들이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돌로 만든 배에 실어 강에 띄웠는데, 그 배가 산티아고 부근에 도착하게 된다. 배낭의 조개는 그때 성인을 싣고 온 배를 상징한다.
야고보 성인의 유해는 근처 야산에 매장되었다. 800년이 지난 9세기 초, 한 수도사가 별빛의 인도를 받아 무덤을 발견했고, 교황청의 고증을 거쳐 야고보의 무덤으로 인증된다. 그때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던 시기였기에, 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가톨릭 부흥을 위해 산티아고 성지 순례를 장려한다. 그로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stela)’,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한 순례길이 시작되었다.
이 길은 20세기 초 가톨릭 부흥운동의 하나인 ‘꾸르실료 운동’이 시작된 길이기도 하다. 개신교에서 이 제도를 차용하여 ‘트레스디아스’ 운동을 시작했다. 꾸르실료 교육을 받고 꾸르실리스타가 되던 날의 감격이 새롭다.
자전거를 탄 젊은이 대여섯 명이 지나간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사람에게는 증서를 발행한다. 걸어서 온 사람,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 그리고 말을 타고 온 사람.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는 확인 증서를 준다고 했다.
앞서가던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어제처럼 오늘도,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걷고 있다. 처음 이 길을 혼자 오려고 했었다.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자유가 아니던가. 마음껏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 혼자 사색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위해 훌쩍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아내가 함께 가겠다고 했다. 직장에서 어렵게 휴가를 받아냈다. 이렇게 걸어보니 알겠다. 둘이서, 혹은 여럿이 오더라도 결국 혼자 걷게 된다는 것을. 각자의 길을 각자 걸어가는 것이다. 그날의 목적지만 정해놓으면 된다.
천 년 전, 어떤 분이 걸어갔던 길을 걸어간다. 길가에 싸리꽃이 화사하다. 연초록 새순들이 삐쭉삐쭉 돋아난다. 한 줄기 햇살이 숲을 헤치고 물웅덩이에 내려와, 빛으로 반사되어 나를 비춘다. 눈이 부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봄 숲이 가지를 흔들어 길손을 환영한다.
새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저렇게 각기 다른 음색을 통해 순례자에게 제각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소리를 길게 뽑아 ‘쑤우 꾹, 쑤우욱 꾹’ 말을 걸어오는 놈이 있는가 하면, ‘삐비 삐이삐비’ 자지러지게 목소리를 몰아치는 녀석도 있다. 천년 전에도 저렇게 똑같은 소리로 길손을 불러 세웠지 않았을까?
작은 산 하나를 넘자 또 마을이 나온다. 7,80여호가 되어 보이는 시골마을이다. 마을과 마을로 이어진 길을 걷다 보면 산티아고에 이를 것이다. 마을이란 길들이 모여 사는 곳. 강줄기가 모여 호수를 이루듯, 사람들이 흘러 들어오고 나가는 곳. 그들을 위한 주막이 있는 곳, 그곳이 곧 마을이다.
길은 핏줄이며 동맥이다. 사람이 사는 곳을 서로 이어주는 연결망이니까. 로마가 제국을 건설하고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길을 잘 만들어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곳 스페인이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것도 바닷길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보면, 조선 숙종 때 평안도 관찰사가 길을 닦아야 한다고 했더니, 숙종은 ‘치도병가지대기(治道病家之大忌), 곧 ’길 닦는 것은 병법에서 기피하는 일‘ 이라 답하여 결국 길을 닦지 못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대륙과 섬나라의 잦은 침공 때문에 길이 없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래가지고 나라가 번영할 수 있겠는가.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결국 길을 열지 않겠다는 잘 못된 판단이었다. 길이 열리면 나라가 흥하고, 길을 막으면 나라가 망한다.
나라의 흥망성쇄가 길에 달려있다. 나는 내 조국에 역사를 내다볼 줄 아는 지도자가 나오길 고대한다. 막혀있는 한반도 북녘땅을 열어갈 수 있는 지도자, 그 길을 타고 대륙으로 힘차게 기운을 펼쳐나갈 혜안을 가진 리더. 아흔아홉을 양보하더라도 그 길 하나를 얻어내면, 바로 그 하나가 아흔아홉을 넘치게 채워줄 것임을 아는 선구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만이 우리 민족이 융성하는 길이므로.
마을을 지나며 담 너머로 보니 닭장 안의 닭이 우리 시골 토종닭을 닮았다. 그런데 닭이 왜 한 마리뿐일까. 애완용일까. 장작을 패서 가지런히 처마 밑에 쌓아놓았다. 강원도를 걸어가면서 보았던 모습과 똑같은 풍경이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저렇게 비슷하다.
이정표가 세워져있다. 아래쪽에 Navarra라는 큰 글씨가 보인다. 행정구역을 구분하는 지역 이름이다. 스페인은 지방색이 강하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서로 싸움도 많이 했던 모양이다. 이곳 나바라 지역은 바스크인들이 많이 사는 고장이다. 그래서 도시 이름도 바스크어를 포함하여 두 가지로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매스컴을 통해 스페인 동북부 지방, 피레네 산맥에서 바르셀로나를 거쳐 발렌시아로 이어지진 400㎞ 길이의 인간사슬 시위에 주민 수십만이 참여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독자적 문화를 갖고 있는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지만 마드리드 중앙정부로부터 받는 것은 별로 없고 빼앗기는 것이 많다며 분리 독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산등성이에 오르자 론세스바예스 성모상에 부조로 조각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시는 성모상 아래 “이곳에서 우리 론세스바예스 성모님께 구원을 기도하라”라는 말이 새겨져있다. 스페인어로 적혀 있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서 그 뜻을 알았다.
산길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무거운 배낭을 힘들게 메고 가기에 말을 걸었더니 다리가 쥐가 나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걷는 중이라 했다.
Biscarreta 마을을 지난다. 몇 백 년 전에 지었는지 모를 정도로 오래된 건물, 그리고 말끔하게 단장된 집들이 섞여있다. 돌로 된 건물은 창고로 쓰는 걸까. 문짝이 바래고 삭아 떨어져 나갔는데 그대로 방치되어있다. 그 곁에 신형 세단을 세워놓았다. 고대와 현대가 세월을 건너 뛰어 나란히 서있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Bar’가 보인다. 한국에 주막이 있듯이, 이곳에는 ‘바’라고 부르는 곳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판다. 그리고 웬만큼 큰 마을에는 알베르게도 있어서 순례자들이 자신의 상황에 맞게 쉬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만약 어느 마을에서 잠자리를 찾지 못하면 다음 마을까지 십리정도를 더 가면 된다. 한국도 대략 십리 간격에 마을이 하나씩 있었다. 동 서양의 살아가는 모습이 그런 면에서도 닮았다.
순례자들이 밖에 앉아서 쉬고 있다. 배낭을 내렸다. 어깨가 뻐근하다. Zubiri까지 가는 동안 마을이 하나 있지만 그곳은 상점도 알베르게도 없다고 한다. 10㎞가 넘게 남았으니 먹거리가 필요하면 여기서 마련해야 한다고 순례자들이 얘기해준다. 저들은 누구를 도와주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 같다.
마을길이 콘크리트로 잘 포장되어 있다. 길가 집들이 정리가 잘 되어 있고 페인트칠도 깔끔하게 되어있다. 전에는 비가 오면 이 부근이 진흙탕 길이었는데, 1993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다음 순례자 코스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손보았다고 한다.
길가에 돌담이 길게 이어진다. 아치형 철문 하나가 붙어있기에 빈틈으로 보았더니 공동묘지다. 오래된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동네에서 함께 살다가 죽어서도 저렇게 오순도순 모여 고향을 지키는 모양이다.
빗물에 씻겨간 길에 자갈이 드러나 있다. 숲은 햇빛이 제대로 들지 못할 만큼 울창하다. 길은 두 사람이 겨우 비켜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앞서 가는 여자의 차림이 좀 독특하다. 50대로 보이는데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제법 큰 가방을 앞뒤로 둘러맸다. 이름은 마리아. 홀랜드에서 왔다고 한다. 불교에 심취해 인도와 일본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다고 했다. 성악을 전공했다기에 노래를 잘 하느냐고 했더니 빙긋이 웃는다. 순례길에서 성악가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아니겠냐고 했더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래를 시작한다. “마리아 마리아….” 청아한 목소리가 뜬금없이 산천에 울려 퍼진다. 자기나라 민요라고 했다. 앞서가던 순례자 몇이 뒤를 돌아본다.
소나무 그늘 아래 아내가 한국인 아주머니와 함께 앉아있다. 아까 만났던 김선생의 부인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서울 청담동에 산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있는 동안 김선생이 도착했다. 배낭이 많이 무거워 보인다.
오르막길을 걸으면 내리막길이 나오기 마련이다. Zubiri 3.4㎞ 표지판이 보인다. 숲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오래된 집터가 나온다. 순례자들을 위한 여관이었단다. Venta del Perto. 제법 규모를 갖춘 건물이었다는 것을 돌로 쌓은 넓은 집터가 말해주고 있다. 썩은 나무판자와 기둥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철로 만든 욕조 하나가 나뒹굴고 있다. 벌겋게 녹이 슬었다. 세월은 저렇게 야금야금 모든 것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가고 있다. 나무도 바위도 쇳덩이도 모두 한 줌 가루가 되는 것이다. 저기 피어나는 꽃송이도 나르는 새도, 그리고 인간도.
"Welcome to Sport Hall…6-9". 식당 안내문이 나무에 걸려있다. 마을이 멀지않았나보다. 숲을 벗어나자 아담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Zubiri다. 청담동 아주머니와 아내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농가 뜰에 핀 튤립의 빨강색과 이파리의 초록색깔이 눈길을 확 끈다. 꽃도 물도 나무도 공해가 없어 저렇게 제 모습을 뽐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다리를 건너 마을에 들어선다.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한 사람당 8유로다. 건물이 꽤 넓어 보여 몇 사람이나 수용할 수 있느냐 물었더니 150베드라고 했다. 방마다 크기가 달라 우리는 2층에 있는 12인용 방을 배정받았다. 옆방은 네 명을 수용한다고 했다. 오후 2시30분이다.
짐을 푼 다음 아내와 함께 시내를 돌아보았다. 일요일이라선지, 시골이라 그런지 마을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바 한 군데가 문을 열었는데 젊은이 몇이 한담을 나누고 있다. 인적 없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식당이 보인다.
음식을 주문해 먹고 있는데 청담동 김선생 내외가 들어온다. 다리는 괜찮냐고 물었더니 견딜만 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카미노 길은 원래 천천히 걷는 길이 아니더냐고 한 마디 덧붙인다. 젊은이들이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진다. 맥주 한 잔을 나누면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한국인 부부가 들어온다. 오랫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은퇴를 했는데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이 길에서 만난 두 번째 한국인 부부다. 이재홍씨라 했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한참을 쉬었는데도 아직 해가 남아있다. 마당에서 한국 젊은이 몇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반가웠다. 맥주나 한 잔하자며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여정을 마치는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어갈 길동무이다.
원가희, 정지은, 김나연, 그리고 파리에서 와인 공부를 하고 있다는 중국인 알렉스다. 가희는 대학 졸업 후 신문사에 근무했는데 이 길을 걸으며 진로를 생각해 보겠다 했고, 지은이와 나연이는 학생인데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게 좋을지 이 길 위에서 결정하고 싶다고 한다. 기호승씨는 건축회사에 근무하는데 이 길을 걷기위해 휴가를 받아 왔다고 했다. 이 길은 종교적 이유로 걷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젠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발견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길이 되고 있다.
숙소 마당에서 원대한과 그의 어머니를 만났다. 늦게 도착했는데 빈방이 없다며 강당에 메트리스를 깔아주었다고 한다. 찬바람 도는 넓은 강당 한쪽 바닥에 메트리스가 너댓 장 깔려있다. 우리 방에서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알베르게에 따라 침구를 주는 곳과 주지 않는 곳, 침대 시트를 주는 곳과 주지 않는 곳으로 구분되고, 그에 따라 값도 오르락내리락 한다.
내 방에 들어가 보니 침대 한 칸이 아직 비어있다. 관리 착오인지 확인하려고 사무실에 가 보았는데 아무도 없다. 대한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어머니라도 침대에서 주무시게 되어 다행이라고 아들이 좋아한다.
순례길 세 번째 밤이다. 어렴풋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가만히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대한이 어머님이다. 아들이 잘 자나 살피고 오신다고 했다. 시간이 꽤 지나 잠결에 얼핏 들으니 또 나가시는 모양이다. 두 번씩 일어나 아들 잠자리를 살펴보고 오시는 어머니. 다 큰 아들이지만 어미의 눈에는 보살펴 줘야할 아기일 뿐이다.
어머니. 소리 없이 내려 밤새 가만가만 대지에 스며들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는 이슬. 새벽하늘을 흠뻑 적시고도 해 뜨면 흔적 없이 몸을 감추는 한 방울 이슬 같은 존재. 그런 분이 어머니가 아닐까. 밤이 깊어간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