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과 함께, 왼쪽부터 원대한, 대한이 어머니, 대한이 친구, 우리 부부, 김상교 사장 부부 |
푸른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 빨간 배낭을 끌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배낭을 짊어지지 않고 수레에 메어 끌고 가는 저 여인. 아하, 이 길을 저렇게도 갈 수가 있는 모양이다. 조심 조심 언덕을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가 더 조심스럽고 애가 탄다.
산모퉁이를 돌자 마을이 나오고, 강 하나를 건너자 동네가 보인다. 그리고 다시 야트막한 언덕을 넘자 도시가 나타난다. 팜플로나(Pamplona)다.
팜플로나는 스페인의 17개 자치주 중 하나인 나바라주의 주도(州都)다. 인구 20만 정도인 이 도시는 '산 페르민' 축제로 유명하다. 매년 7월 6일부터 일 주일간 열리는데 축제의 백미는 '엔시에로(Encierro)'라 불리는 소몰이 행사다. 행사 기간 중 매일 아침 8시에 투우경기에 쓰일 소들을 사육장에서 풀어놓으면 팜플로나의 시가지 골목길 825m를 사람들과 함께 달려서 투우장에 골인한다. 1924년 이래 15명이 죽고 200여명이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위험천만한 행사다. 금년 행사에서도 두 명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축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뜬다>에 '엔시에로'가 소개된 후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지금은 행사 기간 동안 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리는 세계적인 축제가 되었다.
시내를 걸어가는데 가로수가 독특하다. 프라타나스 나무가 길 양쪽으로 심어져 있는데, 나무들이 공중에서 서로 붙어버렸다. 신기하다. 공중의 나무 가지를 접붙이기했는지 모르겠다. 꽤 긴 구간 그런 모습의 가로수가 계속된다.
무너진 돌담 일부를 시멘트 블록으로 보수해 놓았다. 이끼 낀 고풍스러운 돌담 허물어진 사이를 회색 시멘트 블록으로 보수해 놓았다.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 비단 옷에 무명 헝겊을 덧대어 기워 놓은 형상이다. 돌담이니 돌을 쌓아 보수를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1시45분, 시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성당을 개조해 순례자 숙소로 만들었다고 한다. 3층 석조 건물이다. 1782년 개축했다고 돌에 새겨져있다. 천정이 높고 웅장하고 화려하다. 114명 수용 가능한 곳인데 숙소는 물론, 화장실이며 부엌 등, 시설이 잘 되어 있다. 어제 만났던 한국 청년들을 모두 만났다. 각자 걸어오지만 물이 웅덩이로 모이듯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다. 장을 봐다가 한국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기로 했다.
시내로 나와 식품점을 찾아갔다. 고깃집에 돼지 뒷다리가 주르르 걸려있다. '하몽'이라고 한다. 스페인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고기다. 통째로 걸려있는 고기를 필요한 만큼 칼로 잘라서 팔고 있다. 도토리가 많은 고산지대에서 돼지를 길러 특별한 가공 방식으로 만들어낸 고기다. 짭쪼름하고 씹히는 맛이 좋다. 역사적으로 바다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라 오랫동안 바다에서 생활하는 뱃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개발된 저장방식이라고 했다. 와인 한 잔을 곁들이니, 하몽과 와인이 찰떡 궁합이다.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할때까지 세계를 지배했던 이 나라, 바다를 종횡무진 누비던 해적선의 본거지였던 이 땅. 그래서 뱃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인 하몽이 개발되었던 모양이다.
걸어가면서 그 지역의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재미다. 하몽 한 덩어리, 스페인산 와인, 쌀을 비롯하여 바구니 가득 장을 봤다. 부엌에서 지지고, 볶고, 끊이고, 삶아서 한 상 가득 차려놓았다.
스페인산 와인 맛이 일품이다. 잔을 들고 건배를 한다. "번집시다!". 10년 전쯤 중국 연변을 방문했을 때 조선족 친구들이 했던 건배사다. 술잔과 술잔으로 번지고, 마음과 마음으로 번져가자는 뜻이라 했다.
다 함께 술잔을 높이 들었다. "번집시다" 스페인 팜플로나에 한국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4월 30일(화) 넷째 날-팜플로나에서 뿌엔떼 라 레이나(Puente la Reina)까지 24km
비가 내린다. 아침 7시, 우장을 둘러쓰고 출발한다. 나바라 대학 입구 안내판에 "환영합니다"라는 말이 한국어와 함께 영어, 중국어, 독일어 등, 각국 말로 적혀있다. 순례길 여정에 있는 대학에 들러 확인을 받아 이 길을 끝까지 마치면 학점으로 인정해 준단다. 어제 만났던 한국 아이들도 이 대학에 들려갈 예정이라 했다.
비가 멈췄다. 팜플로나 시내를 벗어나자 끝없는 밀밭이다. 초록 벌판에 노란색 유채밭이 군데군데 박혀있다.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밀밭 가운데로 가르마처럼 길이 나있다. 그 길을 따라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걸어가고 있다.
배가 살살 아파온다. 아내는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웬만하면 참고 휴게소까지 걸어가고 싶은데 뱃속이 심상치가 않다. 설사가 난 모양이다. 배낭을 길가에 벗어 놓고 밀밭 속으로 들어갔다. 허리근처까지 자란 밀밭에 앉았다. 아늑하다. 세상에, 스페인까지 와서 밀밭에 앉게 될 줄을 누가 알았나. 이렇게 자연에 하초를 대고 앉아있으면 대지의 기가 전해 옴을 느낄 수 있다. 어릴 적, 월출산에 산나무를 하러 갔다가 배가 아파 깊은 산중에 바지를 내리고 앉아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다시 언덕을 오른다. '페르돈 언덕'이다. Peredon, 스페인어로 '용서'라는 말이다. 이 언덕은 용서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사소한 오해로 인해, 혹은 피치 못할 사연 때문에 가슴에 피멍이 드는 상처를 줄 수가 있고, 받을 수도 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사람이지만 용서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면서 이 길을 걸어가면 응답 받을 수 있는 언덕이라 했다. 누구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더라도 이 언덕에서 용서를 구하면, 용서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 했다.
길이 질척거리기 시작한다. 신발에 흙이 달라붙는다.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 땅이 발을 붙잡아 끈다는 생각이 든다. 진흙길에 미끄러지는 사람이 보인다. 어떤 여인은 길이 너무 험하다며 포기하고 되돌아간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저렇게 흙이 달라붙고, 용서하려다 다시 미끄러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어 다음 기회로 미루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말한다. 용서하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길이라고. 그것을 몰라서가 아닌데, 미움이나 상처를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긴 세월이 흐른 후에야 용서하지 못한 지난날을 후회한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내가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을 차근차근 기억해낸다. 고향 산자락에 누워계신 우리 아버지. 또래들이 학교를 가는데 지게질하며 농사를 짓던 어린 시절, 가난이 모두 아버지의 탓인 양 많이도 원망했었다. 우리 어머니. 나는 왜 그렇게 어머니에게 따뜻한 아들이 되어드리지 못했을까. 내 동생, 친구, 그리고 또….
오래 전의 일들이 하나씩 눈앞에 펼쳐진다.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다 아리다. 그리고 눈물이 쏟아진다. 그들 앞에 무릎 꿇고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
내 가슴에 맺혀 있던, 생각하기조차 싫은 얼굴을 떠올린다. 한 사람씩 불러내어 그 때 왜 그랬냐고 따져 묻고, 멱살을 잡아 뺨을 한 대씩 후려치고 나니 가슴이 다 후련하다. 신발에 붙어있던 진흙덩이가 떨어져나간다. 아, 그래도 그 중 몇은 도저히 용서 할 수가 없다. 어떻게 나에게 그런 말을,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기도가 부족한 모양이다. 이 순례길이 끝나기 전에 그들을 용서하는 은총을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페르돈 언덕, 790m 높이의 꼭대기에 다달았다. 순례자들의 모습이 청동으로 만들어 주욱 세워져있다. 말을 타고 가는 사람, 걸어가는 사람, 어린아이, 강아지 모습까지. 이 기념물은 1996년 '나바라 까미노 친구들 연합'에서 세웠다. 기념비에 "별들이 바람에 따라 흐르는 길"이란 글이 적혀있다. 나도 '바람 따라 흘러가는 별'인가.
언덕을 내려간다. 저만치 앞서 걸어가던 아내가 갑자기 다리를 절뚝거린다. 무릎이 아프단다. 진흙구덩이를 올라오느라 무리했던 탓일까. 조심조심 옆걸음으로 내려간다. 출발하면서 "나는 문제가 없는데 당신이 걱정"이라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저렇게 문제가 생겼다. 남은 일정이 창창한데 다 마칠수나 있을런지 모르겠다. 산 아래서 대한이 엄마 일행을 만났다. 무릎이 아프냐고 묻더니 무릎 붕대를 꺼내주신다. 붕대를 감고 나니 한 결 낫다고 한다.
개를 두 마리씩 데리고 일가족이 걸어가고 있다. 페르돈 언덕을 넘어오면서 마음에 쌓인 찌꺼기를 다 씻어버린 탓인지 강아지 얼굴까지 다 환하다. 잠은 어디서 자는지 물었더니 알베르게나 공공건물의 잔디에 텐트를 치고 잔다고 한다.
언덕 모퉁이를 돌아서니 유채밭이 나타난다. 노랗게 꽃이 핀, 끝이 보이지 않는 유채밭이 장관이다. 들판이 끝나면 마을이고, 마을을 지나면 다시 들판이다. 철로 만든 야고보 성인의 동상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세워져있다.
마을 좁은 골목 양쪽에 돌로 지은 오래된 집들이 늘어서있다. 낡았지만 관록을 과시하고 있다. 문 앞 손잡이로 걸려있는 조각품 하나가 집 주인의 품격을 보여준다. 귀족들이 살던 마을이라 했다.
오바노스Obanos를 지난다. 이 마을은 '오바노스의 신비'라는 전설로 유명한 마을이다.
카미노에서 일어난 아키텐의 공주 펠리시아Felicia와 그녀의 오빠 길레르모Gillermo 공작에 관한 이야기인데, 파울로 코엘류의 소설 <순례자>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오랜 옛날 프랑스 남부에 있던 아키텐 왕국의 공주 펠리시아가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과 순례자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왕이 아들 길레르모에게 여동생을 데려오도록 명령한다. 오빠 길레르모가 동생을 만나 설득을 했지만 끝내 거절한다. 이에 순간적으로 격분한 오빠가 동생을 살해하고 만다. 오빠는 순례길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자신의 행동을 크게 뉘우치고 회개하여 동생이 하던 일을 계승하기로 결심한다. 길레르모는 이곳 오바노스에 정착해 성당을 세우고 가난한 이, 병든 이, 순례자를 위한 삶을 살았으며,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워낙 오랜 역사를 가진 길이라 마을 따라 길 따라 여러 가지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다.
오늘의 목적지 Puente la Reina에 도착했다. Puente la Reina는 '왕비의 다리'라는 의미다. 강물에 휩쓸려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이 죽어간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11세기에 '마요르 왕비'가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 후 순례자들이 편하게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고, 도시 이름이 그로부터 비롯되었단다.
마을 입구 알베르게가 만원이다. 다른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큰 길을 따라가는데 고색창연한 건물과 성당이 세월의 무게를 전해주고 있다. 어, 가다 보니 다리입구에 다달았다. '왕비의 다리'다. 돌로 만든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리다. 그 옛날 어떻게 이런 다리를 만들어 냈을까.
전에는 이 다리 위에 쵸리Txori의 성모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쵸리(바스크어로 '작은 새'라는 뜻)가 규칙적으로 날아와 부리로 성상의 얼굴을 청소했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그 성모상이 지금은 이 마을 San Pedro 성당으로 옮겨 모셔있고, 오늘날 이 마을 축제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목이 마르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 흐르는 저 물을 마음껏 마시면 딱 좋겠다. 그렇지만 물을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 특히 이지역의 물은 그렇다. 12세기에 이 길을 걸었던 비코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이 곳에서 멀지 않은 살라도라는 강은 마시면 안 되는 물로 설명되어있다. 비코 일행이 그 강가에 도착했을 때, 나바로 사람 둘이 강둑에 앉아 칼을 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단다. 말에게 물을 먹여도 좋은지를 그들에게 물었는데 괞찮다고 했다. 그런데 말에게 물을 먹이자 그 자리에서 말이 죽었다. 두 명의 나바로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죽은 말들의 가죽을 벗겼다고 한다. 비코는 나바로 사람들이 동물과 성행위를 하더라는 내용도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 오래 전에 쓴 기행문이 전해져서 그 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기록이란 게 그렇게 소중하고도 무섭다.
그런데 살라도라는 이름은 '짠 맛이 나는'이라는 뜻으로 비코가 언급한 이후로 바뀌지 않고 있다. 후대의 일부 역사가는 비코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말들이 살라도 강물을 마시고 죽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강물이 짜고 맛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말이 마시고 죽을 정도의 독물은 아니라는 얘기다.
다리 건너 언덕 위 알베르게에 배낭을 풀었다. 4시 30분 도착. 힘든 하루였다. 보통은 8유로인데 독방을 사용하면 10유로다. 저녁 식사는 순례자메뉴로 9유로다.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인다. 꿀맛이다. 건너편 테이블에 한국 여자 한 분이 앉아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영국에 교환교수로 가 있는 이교수인데, 남편에게 아이들 맡겨두고 혼자서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저녁 식사시간. 각국에서 온 100여명이 한 자리에 앉았다.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와인이 한 잔씩 돌아가자 분위기가 무르익어간다. 포도농장이 많아서인지 와인 인심이 좋다. 두어 잔을 마셨다. 한국인은 우리 부부와 김상교 사장 부부, 그리고 이교수, 다섯 명이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마드리드에서 왔다는 도마스란 분이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더니, 스페인 노래를 한곡 걸쭉하게 뽑아낸다. 노래솜씨가 웬만한 가수 뺨치는 수준이다. 여기저기서 휘파람을 불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분위기에 취한 탓이었을까. 이번엔 내가 벌떡 일어섰다. 내 소개를 한 다음, 진도아리랑을 한 곡조 불렀다. 박수가 쏟아졌다. 그런데 흥이 남았던 모양이다. 청중에게 한국의 전통 음악인 아리랑을 한 번 배워 보겠느냐고 물었더니 또 박수를 친다. 내가 선창을 하고 모두 따라 부르게 했다. 두어 번 반복했더니 금방 따라서 부른다. 아리랑이 가사는 물론 곡도 외국인이 따라하기에 쉬운 노래인 성 싶다.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나는 덩실덩실 춤을 췄다. 스페인 하늘에 우리 아리랑이 흥겹게 울려 퍼진다. 노래를 끝내고 앉았더니 앞자리에 있던 이 교수가 "정 선생님, 애국하신 겁니다." 짤막하게 농을 건넨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