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국가폭력에 희생된 유가족의 통한 풀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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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6·25때 국가폭력에 희생된 유가족의 통한 풀어주세요

양유복 전 도포농협 조합장
"아빠 어디가?", "아빠 금방 꽃신 사가지고 돌아오마."
3살 된 어린 딸에게 꽃신을 사주겠다며 나간 뒤 경찰에 연행되어 끝내 돌아오지 못한 나의 아버지, 23세 꽃다운 나이에 임신 6개월의 몸으로 딸의 꽃신을 사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난 남편을 싸늘한 주검으로 맞이한 나의 어머니. 그날 어머님 배속에 있던 나는 1950년 11월 2일 이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를 보지도 부르지도 못한 채 통한의 세월을 살아왔다. 정권야욕에 도취해 국민의 생명을 파리 목숨으로 생각한 대통령 이승만의 만행은 내 가족의 시련과 고난의 시작이었다.
올해 74살인 나는 지난 3월15일 광주 시민회관에 떨리는 손으로 노크한 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고 양재철 선생님의 가족이냐고 묻기에 "예 그렇습니다. 제가 양유복입니다"라고 대답한 뒤 착잡하고 긴장된 서글픈 감정 속에 의자에 앉았다. 신분증과 준비해온 서류를 넘겨주자 서울에서 내려온 대한민국 진실화해위원회 과거사 진상조사관이 진솔한 대답을 부탁했다. 누구에게 아버지의 사망 이야기를 들었냐는 질문에 어머니에 들었다고 했다.
나의 머릿속에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3살 위 누나와 함께 우리 세 가족이 어렵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물이 소리 없이 내리기 시작하고 목이 메 대답하기가 힘들었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막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조사관의 물음에 자세히 대답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뒤 우리 아버지와 한마을에 사는 절친한 친구가 경찰에 연행됐다. 대통령 이승만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직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분이다. 마을에서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양재철이라고 대답했고, 아버지는 영문도 모르는 채 영암경찰서로 연행됐다. 1950년 7월 22일 전남 영암군 금정면 연보리 차내골 산에서 100여 분이 아무런 죄도 없이 아무 영문도 모르고 경찰에 의해 집단 사살돼 사망하셨다.
이후 우리 세 식구는 아버지 없이 모진 고난의 세상을 살아야 했다. 어머니와 누나는 보리 단을 머리에 이고 11살 먹은 나는 새끼줄로 보리 단을 묶어 등에 지고 1㎞나 되는 길을 애처롭게 걸어가는 우리가족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인생초기에 너무도 큰 고난과 시련의 날이었고 그 모두가 국가 공권력에 의한 국가폭력으로 발생한 일이었고 다시는 이 땅에서 나와 같은 부모 잃고 온 가족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아버지의 원한과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이자 자식의 할 도리라 생각하고 이승만 정권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조사에 최대한 협조해 명예를 회복시키려 한다. 명령에 따라 총을 쏜 경찰에게는 원망은 있으나 미움은 없다. 그들도 국가폭력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다시는 이 땅에서 부모 잃고 온 가족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자의 직계가족이 살아있을 때 정부는 하루라도 빠르게 그들에게 진솔한 사과와 배·보상을 해야 한다. 빨갱이라고 덮어씌운 멍에를 거두고 명예를 회복시켜 희생된 자의 원한과 억울함을 달래고 유가족의 피눈물 나는 과거사를 잊을 수 있도록 국가의 의무를 다하길 바란다. 74살 6·25희생자 유가족으로서 죽기 전에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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