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두의 망령을 누가 다시 부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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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두의 망령을 누가 다시 부르는가!

이영현 소설가
1927년 9월 23일 조선신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전남 영암군 전 도평의원인 병두일웅(兵頭一雄 효도카즈오)은 본성이 온후하고 인자한 사람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융화에 힘쓰면서 소작인을 사랑으로 보살펴, 주민들의 칭찬이 자자하였기에, 군서면과 북일시면(현 도포면) 소작인들 수백명이 이달 16일, 해창리 도로변에 비석을 건립하고 큰 잔치를 개최하여 송덕을 기념하였다."
병두! 당시 영암군민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그는 1895년 5월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중학을 졸업한 후, 1909년 1월 큰 야망을 품고 영암으로 건너왔다. 당시 영암군 대지주이자 실력자였던 사사키센수케(佐佐木仙助)의 영암농장에 취업하면서 그의 인생은 황금기로 접어든다. 거무스름한 피부에 왜소한 체구였으나 치밀하고 위압적이면서 과단성 있는 업무처리로 곧바로 사사키의 신임을 받게 된 그는 사사키의 중매로 그의 처제와 결혼하게 되었고, 얼마 뒤 사사키가 벳부 여행 중 사망하자 영암농장의 주인이 되어 순식간에 영암의 정치, 경제, 행정, 교육 등을 움켜쥐었다. 전라남도 도평의회 의원, 금융조합과 전기회사, 영암운수, 학교조합 등의 대표를 겸임하면서 군수를 능가하는 권력으로 영암의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했다.
일본인들에게 전답을 빼앗긴 채 소작인으로 전락한 우리네 부모님들은 그의 위세가 두려워 그저 죽는 시늉까지 해야만 했고, 흉년 때 소작료를 한 푼이라도 깎아 주면 감사의 표시로 앞다투어 공적비를 세워야만 했다. 서두에 인용한 1927년 조선신보 기사에 나오는 것 말고도, 영암군 도처에 그의 송덕비가 건립되었다. 현 영암중학교 부지인 그의 집 주변에는 가을이면 볏섬들을 쌓아놓은 낟가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지난해 타계한 영암 군서 출신의 조희종 변호사는 일찍이 그의 자서전에서 "가을철이 되면 병두씨는 송ㅇㅇ(동양척식회사 지배인)씨와 함께 다만들(성지촌 뒷들)에 나와 소작료를 매기고 갔다. 추수가 끝나면 새지내(성지촌) 사람들은 소달구지에 벼가마를 실어다 병두의 마당에 노적을 몇 개씩 쌓아 주었다"라고 적었다. 또 오산 출신의 벽암(碧巖) 오명철 선생은 회고록에서 병두의 배날리 소작밭을 경작하는 어머니에게 가서 젖을 먹고 오는 것이 일과였고, 젖을 먹고 올 때면 배가 출렁거려 때로는 목구멍으로 젖이 넘어왔다고 기술했다. 이처럼 영암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생산된 영암쌀과 잡곡들은 잠시 그의 마당에 머물렀다가 해창을 거쳐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농토와 곡식을 빼앗긴 채 목숨을 연명해 가던 우리 선조들은 견디다 못해 이역만리 만주로, 소련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영암을 휘젓고 다니며 왕처럼 군림했다.
500여년 동안 영암군의 심장 노릇을 했던 군청을 현 성당터에서 왕의 전패를 모셨던 객사터로 옮긴 것은 그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고, 객사등(현 영암공원)에 신명신사를 건립한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쌀이며 면화며 가마니 가격을 멋대로 책정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한 인물도 그였고, 1926년 군청 앞 연지(蓮池)를 메꾸고 금융조합(현 농협군지부)을 신축하여 고리대금으로 군민의 고혈을 빨아들인 것도 바로 그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영암군민들은 효도카즈오의 비석들은 깨부수고 영암군 구석구석에 심어진 벚나무들은 베어다가 불쏘시개로 사용하면서 그의 음침한 미소와 발자국을 말끔하게 지워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제부터인가 영암∼해창간 도로에 다시금 벚나무가 들어서더니 2000년에는 일본의 톱배우이자 세계적인 영화사 도에이(東映)의 회장인 오카다유스케(岡田茂方)가 조부인 병두의 영광을 더듬어 은밀히 방문하곤 했다. 2017년에는 1932년에 조부가 마당가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인근 주민들까지 참여시켜 영암중학교 교정의 소나무 밑에 기념식수 표지석을 세웠다. 그리고 이 일은 한일우호친선 사례로 일본 여러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한일 관계 개선은 필자도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눈물로 부와 권력을 축적한 그를 우리가 다시 영웅시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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