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월출수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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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월출수박의 역사

양유복 전 도포농협 조합장
1960년대 미맥 위주의 영암 관내 농촌은 봄이면 식량이 부족해 보리가 익기도 전에 풋보리를 베어 밥을 짓던 보릿고개가 다반사였다. 그때 그 시절 도포면에 살던 김판길, 양정호, 곽희종씨 등 세 사람이 야산에 삽으로 구덩이를 파 비료 대신 인분을 붓고 씨앗을 파종해 달고 속살이 빨간 수박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만해도 신기하고 고급스러운 여름철 최고의 과일인 수박을 도포면 관내 농민들에게 보급한 것이다. 생산된 수박은 꿀보다도 달고 시원해 광주와 목포의 농산물시장에 가져가면 없어서 못 팔정도로 당시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보리나 벼에 비해 농가소득이 몇 배 이상 높았기에, 당연히 수박을 재배하는 농민은 인기가 대단히 좋았다. 시종면과 신북면까지 수박 재배면적이 급격히 늘어나 영암군은 전남 수박의 주요 생산단지가 되었다.
그러나 2∼3년 실생재배로 수박을 재배해 만활병이라는 병이 발생해 더이상 수박을 재배할 수 없게 되었다. 1969년 나이 20세였던 나 역시 만활병으로 실농을 하고, 죽은 수박 줄기를 가지고 영암군 농촌지도소를 찾아가니 ‘불치의 만활병’이라고 했다. 치료할 농약도 없고 한 번 병이 발생한 토양에는 10년 안에는 수박을 재배할 수 없다며, 유일한 방법은 박에 수박을 접목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접목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했더 우리나라에선 한 사람만이 수박을 접목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는데, 경기도 어디에서 사는지 주소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영암읍내 서점에서 수박 재배 관련 책을 구입해 이를 선생 삼아 박에 수박을 접목하는 일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1970년 봄 박씨를 구입하고 비닐을 잘라 등잔불로 지져 비닐 포트를 만들고, 퇴비와 흙을 섞어 대나무로 비닐하우스를 지어 활접, 삽접, 거접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수박을 잘라 박에 접목했다. 가장 활착률이 높은 활접이 성공률이 높았으며, 박 뿌리에 접목된 수박은 실생 수박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특히 문제의 만활병도 발생하지 않았다. 획기적인 수박 재배 방법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수박 접목 재배를 책만 보고 성공한 뒤 이웃 농가에 기술을 전파해 영암 관내 수박 재배 농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도포면이 주축이 되고 시종, 신북, 덕진, 영암, 미암 등 6개 면에 약 2천㏊ 규모로 전국 최대 수박 생산 단지가 되었다. 수박을 재배하고 후작으로 무, 배추를 생산해 영암 관내 벼 총 판매 금액보다도 수박과 무·배추 판매 금액이 더 높을 때도 있었다.
그 시절 영암 월출수박을 생산하는 2천여 수박 재배 농가가 모여 ‘월출수박축제’와 품평회를 개최하고, KBS 6시 내 고향, SBS 모닝와이드 등 언론을 통해 전국에 방영되기도 했다. 여름철이 되면 전국의 대상인들이 영암 월출수박을 사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뤄 영암 월출수박은 전국으로 판매돼 영암 대표 특산물로 농가에 소득작물로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1990년대 산성비가 내리고 긴 연작장해로 병해가 만연해 수박 재배 방식이 노지에서 하우스 시설재배로 전환됐다. 지금은 하우스 수박 재배가 주축이 되고 노지수박은 약 100㏊ 정도 재배되고 있다. 하우스 수박이 약 200㏊에 재배되고 있는 실정으로, 지금도 영암 월출산 아래 신비의 황토에서 생산된 달고 맛있는 수박으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나는 60년의 재배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겉은 푸르고 속살은 빨간 천연 건강음료이자, 여름철 과일의 왕인 수박을 자부심을 갖고 지금도 재배하고 있다. 월출산 맥반석에 흐르는 물과 천혜의 황토에서 친환경적으로 재배된 내 고향 영암의 월출수박을 더욱 연구해 대한민국 최고의 수박으로 생산하고자 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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