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혼타나스(Hontanas)에서 보아디야(Boadilla)까지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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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17>혼타나스(Hontanas)에서 보아디야(Boadilla)까지 28.6㎞

"신발이 젖어 양말 위에 비닐봉투 덮어 신고…나무도 사람도 흔들리며 자라는 것"

걸어온 길이 아슬하다. 신발이 젖어 양말 위에 비닐봉지를 포개 신었더니 한결 편했다. 비닐이 삐쭉 나와있는 게 보인다.
신발이 아직 축축하다. 그 상태로 걸으면 발이 부르틀 것이니, 양말 위에 비닐봉투를 덧신은 다음 신발을 신어보라고 김 선생이 조언을 한다. 프로미스타(Fromista)까지 걷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오늘은 보아디야(Boadialla)까지 걷기로 약속했다.
날씨가 쌀쌀하다. 바람결이 만만치 않다. 밭둑을 타고 고랑을 건너 굽이굽이 길이 이어진다. 질퍽질퍽한 밀밭 고랑을 한동안 걷다가 큰길로 빠져나왔다.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흔들린다. 봄이 되면 어디서나 바람이 많아지기 마련인데, 다 이유가 있단다. 나무는 가지 끝마다 싹을 틔워야하는데, 물을 그곳까지 올려야한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 물이 쉽게 올라가도록 도와준다. 자연의 신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무처럼 흔들리며 성장한다. 고통이 나를 뒤흔들 때는 인생의 깊은 곳을 되새겨보라고 운명이 나를 흔드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자라는 게 어디 있느냐”고 노래했는지 모른다. 바람이 멈추기를 바라는 것은 허망한 짓이다. 크건 작건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없으니까.
오른쪽에 삐쭉삐죽 서 있는 게 부들이다. 물기가 많은 연못이나 도랑에 자라는 식물이다.
오른쪽에 삐쭉삐죽 서 있는 게 부들이다. 물기가 많은 연못이나 도랑에 자라는 식물이다.
한길로 나와 조금 걸었더니 돌로 지어진 아치형태의 제법 웅장한 건물이 나오다. San Anton 수도원이다. 아치형 건물 밑으로 길이 지나가도록 되어있다. 1095년에 프랑스에서 설립된 수도회기사단이 당시 유럽을 휩쓸던 전염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지은 건물 가운데 하나다. 아치형 통로 왼쪽으로 선반이 보이는데 밤늦게 도착하거나 밖에서 자는 순례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 두던 곳이라 한다.
1492년까지 장장 700년에 걸쳐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이 땅에서 주도권을 쟁탈하기 위해 싸워온 흔적이 저렇게 또렸하게 남아있다.
아치형 건물을 지나자 2km남짓 빤히 바라보이는 곳에 마을이 보인다. 까스트로 예리즈(Castrojeriz)다. 마을 뒷산에 자그마한 성이 보인다. 저 성을 차지하기 위해 오랜 세월 이슬람과 기독교가 싸웠다는 말이 안내서에 나와 있다. 걸어서 국토횡단을 하던 중, 강원도 철원군 민통선 안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아이스크림고지가 생각난다. 작은 산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하도 많은 포탄을 쏘아댔기 때문에 산이 흐물흐물 녹아내려서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저 성도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나보다.
밀밭에 건초를 쌓아놓았다.
밀밭에 건초를 쌓아놓았다.
오른쪽 산등성이 곳곳에 하얀 비닐 통이 세워져있다. 무얼까 궁금해서 가 보았더니 안에 어린 나무가 자라고 있다. 추위를 막아 주고 짐승들이 어린 싹을 뜯어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투명한 비닐 통을 씌워놓은 모양이다.
이 마을의 저택들은 1520년경에 지어졌다고 한다. 500년 전쯤의 건물이다. 집을 대대로 물려받아 살고 있으니 거주지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마을을 관통하는 잘 정리된 길을 따라 1㎞정도 걸어가니 마요르 광장(Plaza Mayor)이 나온다. 스페인의 큰 마을에는 대부분 광장이 있는데 마요르 광장이라고 부른다. 길은 모두 돌로 만들어 있어 오랜 세월 빗물에 씻겼을 터인데 말짱하다. 광장근처 가게에서 아내를 만났다. 아침에 출발하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 만날까 말까다. 각자의 길을 각자 걸어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에 사람이 걸어간다. 점 하나가 굴러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에 사람이 걸어간다. 점 하나가 굴러간다.
다시 걷는다. 마을을 벗어나니 작은 들판이 나오고, 넘어야 할 야트마한 산이 보인다. 걸어보니 만만찮은 언덕이다. 꼭대기에 오르니 경치가 발아래 보인다.
언덕을 넘자 다시 평원이다. 밀밭 사이로 가르마처럼 길이 나있다. 이 길을 걷다가 사망한 사람의 비가 길가에 세워져 있다. 'Manuel Picasso Lopez / 64년 11월-2008년 9월' 마흔네 살 젊디젊은 나이에 어쩌다 이 길에서 세상을 떠났을까.
낮은 지대는 아직 길이 질퍽하다. 어제 비를 맞으며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도 꽤나 힘들었겠다. 비 온 뒤의 들판은 더욱 싱그럽다. 코끝에 묻어오는 밀밭 냄새에서 푸른 물이 똑똑 떨어지겄다.
작은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길가 도랑에 부들이 서식하고있다. 부들, 우리네 시골 방죽 얕은 곳에 많이 자라던 식물인데 아이스케키를 닮았다. 어릴 적엔 부들을 꺾어 아이스케키 인 양 입에 물고 다녔었다. 그런데 그게 스페인에도 있는 줄은 몰랐다.
언덕이 끝나는 곳에서 바나나, 맥주 등을 팔고 있다. 파는 게 아니라 도네이션을 받는다고 했다. 1유로씩이다.
다시 평원이다. 밀밭 가운데 건초를 쌓아놓았다. 저렇게 풀을 말려 놓았다가 겨울철에 사료로 사용하는 모양이다. 평원에 나무 한 그루 외롭다.
이테로(Itero)마을을 지나니 더워지기 시작한다. 신작로를 걷는 순례자의 발길이 무겁다. 이곳 사람들이 낮잠을 자야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이 시원하다. 부러울 정도로 농업용수로가 잘 되어 있다. 아예 웃옷을 벗고 걸어가는 사람도 보인다.
지평선, 끝이 보이지 않는다. 푸른 하늘 아래 낮게 뜬 구름이 손에 잡힐 것 같다. 밀밭 사이로 사람들이 점이 되어 걸어간다. 메쎄다 평원을 걷는다는 실감이 난다.
3시30분경 목적지 보아디야(Boadilla)에 도착. 먼저 도착한 아내가 잠자리를 예약해 놓았다. 60여명이 함께 자는 방이다.
샤워를 하고 나니 개운하다. 옷가지를 빨아 빨랫줄에 널고, 침낭도 내다가 햇빛에 말린다. 순례자들이 햇볕 따스한 잔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웃통을 홀랑홀랑 벗어 던지고 일광욕들을 하는 사람도 보인다. 젖은 빨래와 마음까지 말리고 있는 풍경이 평화롭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인구가 150명 정도라고 하는데, 마켓이 없다. 6㎞떨어진 곳에 도시가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당연히 부엌설비도 되어있지 않다.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순례자를 위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9유로다. 순례자들이 머물 곳을 정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파라솔 아래 한국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와 젊은 여인이 맥주를 마시고 있다. 지나치면서 간단히 눈인사를 나눴다. 전직 국회의원 모씨라고 미세스 김이 넌지시 일러준다. 한국에서 꽤 알려진 유명인사인가 싶다.
목감기가 걸렸는지 낮부터 목이 아프고 간혹 기침이 나온다. 약을 먹었지만 잘 듣지 않는다. 아마 오늘 새벽 찬 바람을 쏘이고 너무 오래 밖에 나와 있었던 탓인가 보다.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준비해 준 순례자 메뉴를 먹었다. 와인이 나오고 다들 즐겁게 식사를 하는데, 몸이 불편하니 만사가 귀찮다. 자고나면 나아져야 할텐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가져온 감기약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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