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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제 대통령제를 폐기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 변경하여 사실상 영구집권 체제를 갖춰 독재자의 길에 들어선다. 김대중 등 정치인을 핍박하고, 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등 수 많은 사건을 조작하며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1979년 YH 사건과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이 터지자,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난다. 이에 박정희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네 번째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시민들이 움츠러들고 있었으나,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가신이 쏜 총탄에 생을 마감한다.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에 의한 군사반란으로 갓 피어난 ‘서울의 봄’이란 꽃잎이 떨어졌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기나긴 박정희 독재의 끝에 드디어 민주주의 세상을 기대하고 있었던 온 국민의 열망을 처참히 짓밟고 정권 찬탈을 기도한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이 있었다. 5월 14일, 15일 양일에 걸쳐 전국에서 올라온 대학생과 시민들이 서울역 앞에 모여 계엄철폐와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였으나 신군부는 무반응이었다. 시위를 지속해야 했지만, 대학생들은 회군을 결정하였다. 당시 효창운동장에는 ‘서울의 봄’을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가 주둔 중이었다고 한다.
부마항쟁 이후 유지되고 있던 비상계엄은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집권을 목적으로 한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구실이 필요하여 ‘김대중’을 구속하였다. “신군부는 김대중을 구속함으로써 광주에서 일어날 소요를 기대했다.” 너무나 조용했던 5월 18일 일요일, 총검으로 무장한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을 장악하였다. 학교로 진입하려는 학생들과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와 있던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공수부대는 무차별적인 폭행을 저질렀다.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한 전남도청 강제 진압이 끝날 때까지 10일간 광주는 단 한 건의 소요도, 약탈행위도 없었던 질서정연한 도시였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전 세계에서 칭송받는 이유이다.
2024년 12월 3일, 무려 44년 만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비상계엄이다. 역사를 통해 배웠듯이 정부와 군대의 강압에 의한 비상계엄의 피해자는 힘없는 일반 국민이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가정을 해보자면, 만약 계엄에 대한 민주당의 사전 경고가 없었다면, 계엄령이 주말이나 새벽에 선포되었다면,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유튜브 라이브 방송이 없었다면, 계엄군의 헬기 이동이 정시에 이뤄졌다면, 국회에서 계엄군 중 한 명이라도 발포했었다면, 시민들이 계엄군을 가로막지 않았었다면, 국회 보좌진과 직원들의 몸을 던지는 희생이 없었다면, 국회의원들이 계엄 해제를 위한 정족수를 못 채웠다면, 계엄 해제 이후 특전사가 바로 철수하지 않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우리는 과거 비상계엄을 발동했던 독재자들의 부정적인 면만을 모두 합한 새로운 유형의 독재자를 만났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과거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퇴보와는 견줄 수도 없는 ‘암울한 추락의 시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수많은 우연의 결과로 우리는 일상의 삶을 지내고 있다. 작가 ‘한강’은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열리는 스웨덴 스톡홀름 한림원 강연에서 그녀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대해 담담히 말한다. “…….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