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문턱에서 나는 한 어린 영혼과 마주쳤다. ‘The Education of Little Tree,’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로 번역되어 그 동안 수많은 국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던 책, 이 책은 바로 저자 Forrest Carter가 유년기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삶의 자전적 회고록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개인의 회고록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진한 울림이 있다. 체로키 인디언의 슬픈 후예로서 자연과 어우러져 살 수 밖에 없었던 어린 소년 Little Tree, 그의 눈을 통해 전해지는 고독, 그리움, 감사, 생명, 사랑 등의 삶의 본질적 가치들은 일상에 쫒기는 우리 현대인들의 회귀 본능을 자극하며 잠들었던 영혼을 일깨우는 삶의 지침들로 새롭게 다가온다.
고아가 된 다섯 살 짜리 나(Little Tree)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 산길을 오른다. 처음 올라보는 산, “시꺼멓게 덮쳐누르는 듯한 산의 무게에 몸을 떨었다”면서도 “실제로 걸어보니 산이 손을 벌려 온몸으로 감싸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며 나는 산의 품에 온 몸을 내맡긴다. 이윽고 들려오는 할머니의 낮고 부드러운 노래 소리, “숲도, 가지를 스치는 바람도, 이젠 모두 그가 온 걸 알지. 아버지 산이 노래 불러 맞아준다네. 아무도 작은 나무를 무서워하지 않아. 작은 나무가 착한 걸 아니까.” 마치 아버지 산은 내가 올 줄 미리 알았다는 듯이 나를 ‘작은 나무’라고 부르는 인디언식 호칭에서 자연에 순응하고 동화되어 살고자 하는 삶의 경건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이 책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아기자기한 대화들 속에는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삶의 자양분이 되기에 충분한 삶의 교훈들이 알알이 녹아 있다. ‘탈콘 매’의 사냥법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것만큼만 가져야 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작은 키를 곧추 세워가며 배우는 쟁기질과 밭갈이에서는 노동의 신성함과 삶의 진정한 행복이, 그리고 누구나 영혼을 살찌우고자 자신만의 비밀 장소를 갖고 있다는 체로키족의 삶의 모습에서는 물질문명에 가려 잘 볼 수 없었던 나 자신의 영혼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어린 나무’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하나의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리나 먹을 것 따위를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 한다. 그리고 짝짓기를 하고 아이를 가지려 할 때도 이 마음을 써야 한다. 자기 몸이 살아가려면 누구나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만일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칠 일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이익 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몸이 죽으면 마음도 함께 죽지만 영혼의 마음만은 그대로 남게 된다.
그래서 평생 욕심부리면서 살아 온 사람은 죽고 나면 밤톨만한 영혼 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거나 결국에는 그것마저도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이 얼마나 시원스러운 통찰력인가? 그런 영혼이 없는 사람이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되며 그런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를 봐도 더러운 것만 찾아내고, 나무를 봐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고 목재와 돈 덩어리로만 본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꿀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는 것 뿐이라고 할머니는 힘주어 말한다. 이해와 사랑은 당연히 같은 것이며, 그러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사랑하는 체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The Education of Little Tree,’ 원제가 말해 주듯 이 책은 어린 영혼을 온전히 살찌우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교육적 혜안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오늘 날 자녀 교육에 경도된 수많은 부모들의 필독서라 할 만하다.
나와 할아버지는 글은 읽지 못하지만 할머니가 적어주는 책 목록으로 개척촌 도서관 사서와 교감한다.
그리고 거기서 빌려온 책은 다시 할머니의 도움으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줄리어스 시저’를 들을 때면 각기 ‘시저’와 ‘브루터스’의 입장에 서서 열띤 토론 교육의 진수를, 사전을 빌려와서 일주일에 다섯 단어씩 꼬박꼬박 외우게 하는 장면에서는 체화학습을 통해 어휘 개념을 습득시키려는 할머니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어디 그 뿐이랴?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끌려가는 ‘눈물의 여로’ 속에서도 정부군이 제공해 주는 알량한 빈 마차를 타지 않고 뒤에 달고 가면서 끝내 자신들의 영혼을 마차에 팔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는 비극의 과거마저도 사랑하는 역사관을, 법이란 정치가들의 것일 뿐 우리와는 상관없다는 할아버지의 일침에서는 법의 상대성과 비정함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와인’ 씨를 통해 들려주는 체로키족의 교육관은 그야 말로 압권이다. “그는 교육이란 것은 두 개의 줄기를 가진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하셨다. 한 줄기는 기술적인 것으로, 자기 직업에서 앞으로 발전해가는 법을 가르친다. 그런 목적이라면 교육이 최신의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자신도 찬성이라고 와인 씨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줄기는 굳건히 붙들고 바꾸지 않을수록 좋다. 와인 씨는 그것을 가치라고 불렀다. 와인 씨는, 정직하고, 절약하고, 항상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만일 이런 가치들을 배우지 않으면 기술면에서 아무리 최신의 것들을 익혔다 하더라도 결국 아무 쓸모가 없다.”
가치관이 전도되고 교육이 성공과 출세지향의 수단으로 전락되어버린 지금 나 스스로 깊이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아니, 음미로만 끝낼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가치를 새롭게 정착시키는 소중한 지표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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