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河)미술관 개관 준비 바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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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하(河)미술관 개관 준비 바쁜

동강(東江) 하정웅(河正雄)씨

영암은 수많은 명승고적과 찬란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명산이자 국립공원인 호남의 ‘소금강’ 월출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예로부터 강직하고, 정의와 예의를 숭상하는 긍지를 지닌 출중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영예로운 영암 군민임을 항상 자랑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정겨운 고향사람들을 영암군민신문이 찾아 나선다. 이들에게서 영암의 과거에 대한 소회와 미래에 대한 비전도 들어본다.
나의 컬렉션은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 고향에 기증은 평생을 기다려온 일
광주시립미술관 미술품 기증은 도와달라 키워달라 사랑해달라는 요청 때문
인생은 카메라 셔터가 눌러지는 순간, 기증은 받은 것 돌려주는 임무일 뿐
고향은 정과 마음을 공유하는 곳이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성당같은 곳

오는 9월3일 개관을 앞둔 영암군립 하(河)미술관. 군서면 서구림리 381-1에 총사업비 55억원(국비 14억8천만원, 군비 40억2천만원)이 투입된 하미술관은 미술관 1천413.9㎡, 게스트하우스 101㎡ 등의 규모로 이미 준공됐다.
광주에서의 전시회 참석차 귀국한 틈을 이용해 고향인 영암에 들러 미술관 개관 준비 상황을 점검하던 동강(東江) 하정웅(73) 선생을 지난 7월16일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다. 사전에 약속도 없이 찾아간 기자에게 선생은 흔쾌히 반나절의 귀한 시간을 내주었다. 그리고는 미술관 개관의 ‘의미’와 군민들이 ‘해야 할 일’ 등에 대해 신신당부하듯 설명했다.
쪾 평생을 기다린 고향에의 작품기증
선생은 개관을 앞둔 하미술관을 무척 흡족한 듯 바라보았다. 그래서 설명은 시종일관 들뜬 듯 했다. 특히 고향인 영암에 자신의 소중한 미술품들을 기증하게 된 계기를 묻자 선생은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답했다.
“딱 7년 걸렸어요. 정확하게는 만 6년이 지난 것이지요. 지금으로부터 7년 전 김일태 군수께서 상의할 일이 있다며 만나자고 제의해왔어요. 그래서 만났지요. 김 군수께서 내가 광주에 많은 미술품을 기증하고 있는데 선친의 고향인 영암에도 기증할 마음이 있느냐고 묻데요. 당연히 있다고 했지요. 광주에 기증하기 이전부터 내 미술품을 고향에 기증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으니까. 사실 기증 받고 싶다는 쪽의 의사가 없어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지요. 내가 어쩌면 이 (고향에 미술품을 기증해달라는 요청이 있는) 순간을 위해 일생을 기다리며 살았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미안하데요. 이미 광주에 대다수의 작품을 기증한 뒤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남은 작품은 100여점 밖에 없고, 이 정도라도 괜찮으냐고 물었어요. 김 군수께서는 미술관을 만들어 전시하겠다고 하데요. 그길로 시작한 일이 오늘로 7년이 됐고, 9월3일 드디어 미술관이 개관하게 된 거죠. 이것이 내 컬렉션을 고향인 영암에 기증하게 된 출발이에요.”
선생의 미술품 기증은 이처럼 거의 즉석(하지만 실제로 그의 컬렉션은 아낌없이 돌려줘야겠다는 오랜 결심의 결과다)에서 이뤄져 왔다. 아무런 조건도 없다. 그저 자신의 컬렉션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많은 이들이 이에 공감해주면 된다.
영암에 앞서 광주에 지금까지 2천300여점의 미술품을 기증한 계기도 비슷하다.
1993년 광주를 방문했을 때 막 개관한 광주시립미술관은 변변한 작품 하나 없어 미술관의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당시 강영기 광주시장과 차종갑 미술관장이 선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생은 선뜻 응했다. 선생은 당시를 회고하며 “시장과 관장님께서 광주시립미술관을 도와 달라, 키워 달라, 사랑해달라고 부탁해서 나섰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도 그는 광주시립미술관을 도와주고 키워주고 사랑하고 있다. 그의 명함 첫머리가 ‘광주시립미술관’이고,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인 것만 보아도 그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어쨌든 이래서 광주는 그의 또 다른 ‘고향’이 됐다.
쪾 샤갈에서 손아유까지 3천여점 기증
선친의 고향인 영암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미술품을 기증했느냐는 질문에 “3천여점 정도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오늘까지도 추가 컬렉션을 하고 있다”며 기증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미술관은 소장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미술관은 움직여야 해요. 내 고향에 생겨날 미술관에 미술품이 100점 밖에 되지 않으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추가 컬렉션을 오늘까지도 하고 있어요. 그 결과 이제는 대략 3천여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100점에서 3천점으로 늘었으니 큰 의미가 있지요. 물론 미술관 건물이 크다고, 시설이 넓다고 좋은 것은 아니에요. 뜻과 혼과 정신과 철학이 담겨 있으면 되죠. 내가 모은 3천여점의 작품은 모두 그런 차원에서 컬렉션 한 것으로 보면 될 겁니다. 100점이던 미술품이 3천점이 되기까지 김 군수와 군민들도 똑같은 노력을 한 것 같아 얼마나 고맙고 뿌듯한지 몰라요. 처음에 미술관은 3천여평의 부지에 건물은 300평 정도면 좋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현재 부지가 2천평, 건물이 600평으로 늘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실제로 이 말 끝에 선생은 마치 어린애처럼 박수를 쳤다. 김 군수와 군민들에게 감사하는 뜻이었다.)”
하미술관이 전시하게 될 선생의 컬렉션은 샤갈, 미로, 헨리 밀러 등 저명한 화가와 전화황(全和凰), 손아유(孫雅由) 등 재일교포 작가들의 작품이 들어있다. 시공을 초월한 그야말로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부를 작품들이다. 뿐만 아니라 미술관 야외에도 작품 하나하나에 생명과 의미를 품은 예술품들을 기증해 설치해놓았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생명의 순환을 표현한 한남대 미술대학교수의 작품, 미래의 꿈을 표현한 조선대 미술대 정윤태 교수의 작품 등이 그것이다.
쪾 인생은 셔터가 눌러지는 순간일 뿐
선생의 작품수집활동은 25살 청년시절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이처럼 모은 소중한 컬렉션을 아낌없이 기증하는 이유를 묻자 선생은 “인생은 카메라 셔터가 눌러지는 순간과도 같다”며 “순간의 인생을 살면서 내 부모님과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주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부모님의 사랑으로 태어났어요. 부모님은 아무 것도 없으셨지요. 하지만 늘 존재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어요. 인생은 순간이고 생명이 있을 때 인류를 위해, 지구를 위해, 모든 것을 위해 순간에 해야 할 임무를 다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래서 돌아갈 때에는 아무 것도 없이 돌아가야 하고, 잘 살았다 인간답게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운 거지요. 그래서 내 모든 것은 이 사회가 이 세계가 내게 준 것일 뿐,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영암 출신의 가난한 이주노동자의 아들로 193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선생은 재일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냉대와 가난 때문에 굴곡진 청년기를 보내야 했다. 이 때문에 고교 졸업 후엔 미술학도의 꿈을 접어야 했다. 사회초년생이 된 선생은 사업가의 기반을 다질 즈음부터 미술품을 수집하는 일로 그 꿈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가 수집한 작품은 모두 7천여점. 작품 하나하나 내용과 의미가 담겨있지 않은 것이 없다. 세계 거장들의 미술품 뿐 아니라 무용가 최승희의 사진작품, 영친왕 내외의 유품 등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스며있다. 이처럼 소중한 컬렉션이지만 선생은 아낌없이 기증했다. 그것도 광주와 영암 뿐 아니라 서울, 부산, 대전, 포항 등 전국 곳곳에 했다.

호 ‘東江’은 처음 빗물이 강 되게 만든 영암에 모든 것 돌려주겠다는 의지
미술품 하나하나에 ‘하정웅의 삶’, 영암도 미술관 사랑하는 모임 만들어야
미술품 가치 모르면 쓰레기 불과, 의미 찾고 가꾸는 일은 영암군민들의 몫
미술관은 자체가 교육시설이자 행복이 나오는 ‘문화의 성당’…잘 키워가야
쪾 ‘고향’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聖堂
선생이 광주에 기증하고 남은 100여점의 미술품을 고향인 영암에 보내고자 했을 때 그의 일본 내 고향인 아키타현 주민들은 환송 전람회를 열었다. 선생의 고국이자 고향인 한국의 영암에 귀중한 미술품을 보내는 것을 축하하면서 동시에 아쉬워하는 자리였다. 이 소식을 접한 주일한국대사관도 전람회를 열었다.
선생은 “고향은 이렇게 고마운 곳이요, 정과 마음을 공유하는 곳”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오는 9월3일 개관과 함께 열리는 전시회의 주제가 ‘그리운 고향 전’으로 정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내 아버지는 식민지시대에 영암에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그래서 16세 때 일본에 건너가 노동자 생활을 했고, 역시 영암 출신인 어머니와 결혼해 나를 낳았어요. 아마 그분들이 최고로 바랐던 행복은 바로 고향에서 사는 것이었을 겁니다. 나 역시 오사카에서 태어났는데 6개월 만에 아키타로, 그리고 사이타마로 옮겨 다녔어요. 아키타에서는 소학교부터 고교까지 졸업했으니 내 고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선생은 특히 자신의 컬렉션 기증의 의미를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가는 데서 찾기도 했다. 광주는 그래서 그의 또 다른 고향이다. 서울과 부산, 대전 등도 모두 선생이 사랑하는 고향이고, 더 나아가 한국이 그의 그리운 고향이다.
“고향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곳, 바로 ‘성당’같은 곳이에요. 영암은 내 고향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곳임을 세계만방에 보여줄 것으로 믿어요. 김 군수께서 미술관을 설립하고자 했을 때 의회가 세 차례나 반대하는 등 수많은 어려움을 군민들과 함께 극복해 낸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정말로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지요. 이제 꽃이 활짝 피었어요. 영암군민들은 이제 그 꽃의 바다에서 꽃을 하나씩 가져갈 수 있을 겁니다.”
쪾 ‘東江’엔 생명 순환 순간의 인생관 담겨
선생은 자신의 호가 동강(東江)인 이유를 생명과 순환, 순간의 인생관으로 설명했다.
“내 고향 월출산에 내린 빗물은 샘(泉)이 되고, 못(池)이 되며, 내(川)가 되지요. 그런 다음 하천(河)을 이루고, 강(江)을 이루며, 끝내는 바다(海)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증발한 물은 다시 비가 되어 내리고 샘이 되는 거지요. 동강(東江)은 바로 동쪽에서 강이 되리라는 뜻으로 지었어요. 생명과 순환, 찰나의 인생관을 표시했지요. 모든 것을 강이 되게 만든 영암에 되돌려 줘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해요. 그렇다고 오래 생각하고 지은 것은 아니에요. 순간에 떠 오른 것일 뿐. 말 그대로 열심히 살았어요. 정직하게 살았어요. 따라서 미술품 하나하나에 하정웅의 삶이 들어 있다고 보면 돼요. 작품 하나하나에 뜻이 있고 의미가 있어요.”
자신이 수집한 작품에 이처럼 진한 애정을 표시한 선생은 선뜻 영암에 미술관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임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문화와 예술지킴이 같은 후원단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어느 위원이 미술관에 대해 작품만 보관하고 잘 지키면 된다고 했대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그런 일이면 개 한 마리만 있으면 된다고 말이지요. 1993년 광주에 처음 미술품을 기증했을 때 누군가도 그랬어요. 재일교포들의 작품들로 쓰레기만 기증했다고요. 그리곤 10년 이상 인간대우도 안 해줬어요. 광주도 수준이 이랬는데 영암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어요. 문화마인드가 아쉬워요. 영암에 미술관을 후원하는 단체가 꼭 있어야 해요.”
쪾 아카이브 시대, 미술관은 문화의 성당
선생은 그러면서 “이젠 아카이브(Archive) 시대다. 사진 한 장이 큰 가치가 있는 시대”라며 영암군민들이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이 어떤 역사를 담고 있고 어떤 가치가 있는지 찾아내서 가꾸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무리 소중한 것도 가치를 모를 때는 쓰레깁니다. 하지만 그 가치를 알면 전혀 달라지지요. 재일교포 화가 이우환이 그런 경우에요. 그는 대한민국 현대미술의 1인자이자 세계적인 거장인데 처음엔 안 그랬어요. 내가 그의 작품을 기증할 때 모두가 쓰레기로 보았어요. 지금은 100호짜리 그림 한 점이 26억8천만원에 낙찰될 정도에요. 일본 큐슈의 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사쿠베이 야마모토)가 퇴직할 때까지 자신의 힘든 광부생활(1900년대)을 탄광 벽에 그림으로 표현한 기록이 일본 유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입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기록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이듯이. 하정웅 컬렉션 역시 유네스코에 의해 지정되지는 않았어도 그 레벨에 있다고 봐요. 한 시대의 유산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기증한 작품 한 점 한 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고, 왜 영암에 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그 필요성을 지역언론이 설명해주었으면 해요. 흙에 묻힌 돌을 우연히 찾아 그 돌이 보물임을 알아보듯이 묻어져 있던 작품이 어떤 역사가 있고 어떤 가치가 있는지 찾아내서 가꾸는 일은 이제 영암군민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점심시간을 한참 넘겨가며 대화한 선생은 할 말이 더 남은 듯 아쉬워하며 미술관의 의미를 재삼 강조하는 말로 마무리했다. 취재진이 감사의 뜻으로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제안에는 “이제야 하정웅 컬렉션의 뜻을 고향에서 알아주기 시작했다”며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미술관은 그 자체가 교육시설이야. 행복이 나오는 곳이지. ‘문화의 성당’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미술관의 상징 ‘미완의 문’
“하미술관은 아직 미완, 완성은 군민들이 할 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가면 ‘성가족성당’(Sagrada familia)이 있다. 가난한 신자들의 민간단체인 ‘산호세협회’에 의해 1882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1891년부터는 스페인이 낳은 천재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가 참여해 말년까지 건축에 매진했다. 현재까지도 건축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완성된 부분은 착공 100년만인 1982년 완성된 지하예배당, 그리스도 탄생을 주제로 안쪽에 세운 107m높이의 쌍탑과 양측의 98.4m짜리 탑 등이다. 앞으로 건설될 부분은 170m 높이의 중앙탑과 그 뒤 성모마리아를 상징하는 140m짜리 탑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성당의 완성은 앞으로 100년 또는 200년이 더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4개의 탑과 살아있는 듯한 조각들이 이색적인 이 건물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가 있고 지하예배당은 박물관으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우디의 묘도 이곳에 있다. 그가 죽은 뒤 공사에 차질이 빚어졌으나 완성을 위한 목표가 있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지금까지 공사를 추진하고 있다.
하미술관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물인 ‘미완의 문’은 바로 이 성가족성당을 닮았다.
하정웅 선생은 “영암의 하미술관은 내용도 질도 꾸준히 키워나가야 합니다. 100년, 200년, 1천년이 걸려서라도 완성해야 합니다. 미완의 문은 바로 시작이자 완성을 염원하는 뜻을 담아 만든 작품입니다. 미술관을 완성하는 것은 당연히 영암군민들의 몫”이라고 말한다.
취재기자와 함께 ‘미완의 문’을 밖에서 안으로, 다시 안에서 밖으로 연신 들락날락하며 그 때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달라지는 의미까지 설명한 선생은 “미술관 내외부의 작품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 역시 영암군민들이 해내야 할 일”이라고 신신당부했다.
■ 동강 하정웅은?
1939년 일본 오사카에서 재일 이주노동자 하헌식(작고)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암 출신으로 고국에서 더 이상 먹고 살길이 없게 되자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머니 역시 영암사람으로 얼굴도 안보고 일본에 좋은 남자가 있다는 말만 믿고 결혼했다.
고달픈 이주노동자의 삶에 지쳐 그의 어머니는 하씨가 두 살이었을 때 일본에서 도망치듯 고향 영암을 찾았으나 초근목피(草根木皮)의 고국생활을 목격하고는 다시 돌아갔다. 아키타 수력발전소 건설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해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1945년 오사카에서 해방을 맞았으나 귀국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1948년 아버지를 따라 다시 아키타현에 돌아간 하씨는 그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명문 아키타공업고등학교 재학 중 교내 미술부를 창립하는가 하면 아키타현 고교미술협회 회장으로 학생전람회를 이끌기도 했다. 도쿄에서 열린 일본 최초의 반 고흐 특별전을 보기위해 졸업여행을 포기할 정도로 미술에 대한 재능과 열정이 남달랐다.
3학년 봄이 되면 모두가 취직하는 아키타공업고등학교를 그는 졸업할 때까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가난 때문에 대학에 갈 수도 없었다. 화가의 길까지 포기한 그는 무작정 도쿄로 상경했지만 영양실조로 쓰러질 정도로 난관은 계속됐다.
하지만 그에게도 기다림의 끝은 찾아왔다. 새로 시작한 가전제품 판매사업에서 큰 수완을 발휘했고 제법 돈을 벌게 됐다. 이 때부터 재일동포 작가들의 미술품에 눈을 돌렸다.
1993년 광주를 찾은 그는 강영기 광주시장, 차종갑 관장, 오승윤(작고) 화백 등으로부터 광주시립미술관이 건립되어 있고 미술품이 필요하다는 기증제의를 받는다. 그동안 모은 작품을 모아 어릴 적 강제징용 조선인들의 아픔이 서린 아키타에 세우려던 미술관 건립 계획을 접고 광주에 미술품을 기증하기 시작했다. 남은 작품과 추가 컬렉션은 그의 고향 영암에 기증했다.
그의 명함에는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 재단법인 수림재단 이사장, 학교법인 금정학원 이사, 조선대 명예 미술학박사, 한국 전라남도 영암군 홍보대사, 2012여수세계박람회 홍보대사라고 줄줄이 쓰여 있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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