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大同法) 조선시대 진보주의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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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大同法) 조선시대 진보주의의 승리


1649년 효종 때 우의정인 잠곡(潛谷) 김육이 대동법을 양호(兩湖 충청, 호남)지역에 확대하자고 주장하여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들이 대동법을 찬성하는 한당(漢黨)과 반대하는 산당(山黨)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논쟁하였다. 한당의 중심인물은 김육과 조익이었고 산당에는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등 이었다. 김육이 한강이북에 살아 한당이라 하고 김집이 회덕, 연산 등 산림에 살아 산당이라 하였다.
산당의 영수인 김육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화를 당한 기묘8현인 김식의 후손으로 오늘날에도 대동법의 경세가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로, 대동법 시행에 매우 적극적인 진보주의 정치가였다.
본래 산당의 송시열은 기축봉사에서 방납의 폐해를 주장하면서 김육을 옹호하며 대동법 실시를 찬성하였으나 막상 대동법이 공론화되자 대동법 시행을 반대하였다. 아니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는 김육을 반대하였다. 산당의 영수 김집은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자 송시열과 송준길의 스승으로 이들 4인 모두는 문묘에 배향되는 대단한 성리학자들이었다.
그러나 대동법 확대실시는 그 누구의 반대에도 막을 수 없는 시대의 조류였다. 진보적 정치가 김육은 산당의 반대를 극복하고 실시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한 결과 방납의 폐단은 줄고 농민생활은 안정되고 국가재정은 증대해져 그 효과가 객관적으로 나타나자 반대파의 논리는 더욱 궁색해졌다. 이에 송시열도 대동법은 편리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아 좋은 법이라 인정하였다.
아무튼 확대 실시를 반대한 산당의 송시열도 좋은 법이라 인정한 대동법은 1677년 숙종 때 경상도에 1708년 황해도에 실시되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대동법이 처음 실시된 1608년 이후 100년만의 드물게 보는 조선시대 진보주의 승리였다.
대동법의 시행의 결과 조선의 경제는 물론 조선시대 사회전반의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지주의 부담증가와 농민의 부담 감소 그리고 국가수입의 증대를 가져오고, 공납이 전세화(田稅化) 되고, 조세의 금납화(金納化, 세금을 현물이 아닌 금전이나 미곡으로 대체납부)로, 공인 즉 국가가 지정하는 공납업자가 성장하여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여 상업도시가 생기고 화폐경제의 발달을 촉진하여 초기적 상업자본주의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을 분해시켜 종래의 신분질서를 와해시키고 양반중심 지배체제의 붕괴를 촉진하여 자연경제가 유통경제로 바뀌어 조선사회내부의 자본주의로 향하는 내재적 움직임으로 이어져, 오늘날 역사학계의 근대화를 향한 내재적 발전론의 근거를 제공하여, 일제의 우리 역사 부정의 정체성론(停滯性論)을 부정하는 논거로 사용된다.
조선시대 대동법 실시를 두고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예나 지금이나 개혁의 어려움과 기득권세력의 완고함이다. 어쩜 송시열은 기축봉사에서 보듯이 속으론 대동법을 찬성했으나, 스승인 김집이 반대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지지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국익이나 민생보다 당리나 학연 등 사익을 우선시 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고, 대동법의 반대가 신념이었다면 지주 즉 사대부 이익만을 대변하고 민생을 외면하는 수구적 정치가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효종의 북벌추진에 반대한 산당의 논리는 민생우선이었다. 그러나 대동법에 있어서는 민생보다는 기득권 유지의 당파적 이기주의로 일관하여 사안에 따라 상반된 주장을 하였다.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자주 대하는 정치권의 행태이다. 이에 우리는 정치는 항상 그렇다는 냉소적 시각에서 벗어나 그러한 정치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심판하는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당장 이번 12월 대통령 선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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