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형의 洋思想과 역사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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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형의 洋思想과 역사산책

본지 객원논설위원
실록은 편년체로 기록되어 있는데 편년체란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을 말한다. 실록은 왕이 죽은 후에 편찬되기 때문에 왕이 죽으면 춘추관에 실록청을 만들고 여기서 실록을 편찬하게 된다. 본래 실록은 왕이 죽으면 곧 다음 대에 편찬하지 않고 적어도 3대가 지난 후에 편찬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3대왕인 태종 때부터 다음 대에 편찬하는 관례를 만들었다. 우리가 사극을 보노라면, 국사를 논하는 편전의 한 구석에서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데, 이들이 사관이고 이때 적은 것이 바로 사초이다. 임금이 죽어 실록청이 설치되면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사관들이 보관하고 있던 사초를 져오게 하는데, 종종 사관들이 사초를 숨기고 제출하지 않으면 자식을 가두거나 막대한 벌금을 부과하는 등 엄한 처벌을 하였다.
사관이 자신이 쓴 사초를 해당 관청에 제출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 보관하였는데, 사초의 내용을 발설할 경우에는 사화(士禍)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어길 시는 엄한 처벌을 받았다.
실록을 편찬하던 기관이 춘추관인데, 지금도 청와대에서 기자회견하는 곳의 이름이 춘추관인데 이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실록편찬은 사초만이 아니라 시정기.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공적 자료가 사용되었다.
실록의 편찬에는 세 번의 과정을 거치기에 매우 정제된 내용을 얻게 되는데, 처음에 나온 원고를 초조라 하고, 초고에서 빠진 것은 보태고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고, 틀린 내용을 고쳐 중초를 만들고 이를 기초로 체재와 문장을 통일하는 마지막 점검을 하여 정초를 만든다. 이 정초를 책으로 만들어 사고에 보관하는 것으로 실록편찬을 마치는데 실록은 적은 부수에도 불구하고 모두 활자를 사용한 인쇄본으로 만들어 우리 조상들이 실록의 편찬에 얼마나 정성과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으로 실록편찬이 끝나면 초벌원고인 초조와 수정원고인 중초는, 워낙 민감한 내용이어서 모두 없애는데 버리는데, 불태우는 손쉬운 과정을 취하지 않고, 글자를 물로 씻어버리는 방법을 택해 자원을 절약하였습니다. 이를 세초라 하는데 서울 세검정 아래에 차일암이 있는데 여기서 차일을 치고 세초를 하여 그 종이를 다시 사용하였다. 이에 비추어 보면 지금 여. 야가 대통령 기록물을 초본의 삭제를 두고 정쟁을 벌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겠다.
원래 실록은 4권을 만들어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에다 사고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 본을 제외하고 실록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자 이후에 4부를 더 만들어 춘추관과 마니산.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에 보관하다 이괄의 난으로 춘추관 소장본이 불타자, 태백산. 적상산. 정족산 오대산의 깊은 산중에 사고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되기도 한 조선왕조실록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고, 6.25 전쟁 때 적상산본이 북한이 약탈해가 김일성 대학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록의 편찬에 있어서 무엇보다 우리 조상들이 중요시한 것은 첫째로 모든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고 둘째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기록한 것이었다. 이러한 객관성과 공정성은 왕이 사초를 볼 수 없다는 것과, 사관이 사초에 자기 이름을 적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보장되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이 집권세력에 부침에 따라 수정본이 편찬되기도 하였지만 이도 후세 사람의 판단을 위해 실록을 모두 고쳤지만 예전 것도 그대로 남겨 놓아 두 개를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같이 치열하게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을 지정되어 우리 조상들의 기록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세계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우리의 역사에 대한 기록정신은 졸속을 넘어 최소한의 원칙도 없는 한심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사상 유래 없는 국정원의 대통령 기록물의 공개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을 보면서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조상과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지 반문해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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