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 산 수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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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수 치

미얀마 국민이 국부로 추앙하는 인물이 '아웅 산'이다. 그는 1940년대 영국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30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에서 군사훈련을 받는다. 일본과 손잡고 독립투쟁에 나선 끝에 1947년1월 런던에서 영국과 '애틀리-아웅 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 독립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 미얀마는 이어 일본까지 몰아내고 이듬해 독립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7월 수도 양곤의 회의실에서 열린 행정참사회의 도중 정적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의 아내 '킨 치'는 1962년 '네 윈'의 군사쿠데타 전까지 중앙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1960년에는 인도 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웅 산과 부인 킨 치 사이에 태어난 이가 바로 '아웅 산 수치'다. 아웅 산 수치는 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의 이름에서 골고루 땄다고 한다.
아웅 산 수 치에게 1988년은 운명의 해다. 어머니가 인도 대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된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해이자 '888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웅 산 수 치는 국적을 미국으로 바꾼 오빠 '아웅 산 우'처럼 조국 미얀마와는 상관없는 길을 걷는다. 영국인인 마이클 에어리스와 결혼해 남편을 따라 부탄과 영국에서 살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병간호를 위해 조국을 찾은 아웅 산 수 치는 그해 8월 뜻밖의 격변을 겪는다. 1988년8월8일 아침 8시, 이른바 '8888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네 윈 정부는 이른바 '미얀마식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표방하며 서방사회를 적대시하는 제3세력의 중립외교정책을 편다. 쇄국정책 같은 시대착오적 정책들과 독재권력의 부정부패는 경제파탄을 초래했다. 국민들은 폭압과 가난 속에 질식사할 지경에 이른다. 이에 대학생들이 일어섰다. 영국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했던 공작새가 그려진 깃발을 들었다. 군부는 이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됐다. 전 국민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1988년8월8일 아침 8시 수도 양곤의 대학생과 승려, 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사태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 나선 이가 아웅 산 수 치다.
그는 민주세력을 결집해 민주민족동맹(NLD)를 창설하고 사무총장직을 맡는다. 전국을 돌며 새로운 미얀마에 대한 희망을 역설하고 군부독재의 종식을 촉구했다. 하지만 네 윈 퇴진 이후 신군부의 소 마웅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고 시위대에 잔혹한 진압을 시작한다. 아웅 산 수 치에 대해서는 가택연금 한다. '8888항쟁' 때의 약속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치러진 1990년5월 총선에서 아웅 산 수 치의 NLD이 82%의 지지로 압승하지만 군부는 이에 승복하지 않는다. 민주인사들은 구금하고 아웅 산 수 치의 가택연금은 무기한으로 연장한다. 이른바 공포정치로 미얀마는 다시 독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이런 미얀마에 최근 다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웅 산 수 치가 이끄는 미얀마 제1야당 NLD이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확보, 대통령 배출 집권 기반을 완벽히 다졌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NLD는 상하원 전체 의석의 절반인 348석을 차지했다. 과반의석(329석)을 넘겨 자당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을 조건까지 갖췄다. 미얀마 차기 대통령은 내년 3월로 예정된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상원, 하원, 군부 의원단이 각각 1명씩 추천한 후보 중 최고 득표자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아직 예단하긴 이르다. 아웅 산 수 치 여사는 아예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할 수 없다. 외국 국적의 배우자나 자녀를 둔 사람은 대선에 입후보할 수 없다는 미얀마 헌법 조항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미얀마 군부는 선거결과와 상관없이 전체 의석의 무려 25%에 달하는 166석을 할당받기로 되어 있다. 여전히 군부의 힘은 막강하다. 미얀마의 민주화로 가는 여정은 아웅 산 수치 여사의 '중대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아직 험난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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