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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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방문 10일째 이야기<15>

판문점을 향해 출발했다. 판문점을 다녀온 다음 개성 부근을 둘러 볼 예정이다. 개성에서판문점은 약 8㎞란다.
판문점 입구에 도착. ‘조국통일’이라는 구호가 우리 일행을 맞는다. “후대들에게 통일조국을 물려주자”는 벽화가 보인다. 자그마한 안내소가 있고, 그곳에서 기념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판문점 참관로 안내도가 붙어있다. 인민군 장교가 간단한 브리핑을 한다. 군사분계선은 246㎞이고 남과 북 사이에 4㎞의 비무장 지대가 있다는 등, 모형도 앞에서 목표물을 가리키며 설명이 이어진다.
판문점 가는 길 양쪽으로 시멘트 구조물이 설치되어있다. 길가 은행나무 가로수 단풍이 아름답다.
가는 길에 ‘정전협정조인식장’을 먼저 방문했다. 미국 측은 텐트에서 조인을 하자고 했으나 북한측에서 이 건물을 5일 만에 완성해서 이렇게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협정이 조인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판문각에 도착. 김일성 친필탑이 보인다. 김일성이 마지막 남긴 친필탑 이라고 했다. ‘김일성’ 이라고 휘갈겨 쓴 이름 밑에 1994년 7월 7일 이라는 날자가 새겨져있다.
북쪽 높은 탑엔 인공기가 걸려있고 남쪽에는 태극기가 펄럭인다. 한 핏줄이 살고 있는 같은 땅에 서로 다른 국기가 걸려 휘날리고 있다. 1953년 휴전이후, 저렇게 둘로 갈라져 대치하며 살아온 세월이 어느새 60년이 넘었다. 종전이나 평화협정이 아닌, 전쟁도 평화도 아닌,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 못한 어정쩡하고 불안한 ‘정전 상태’로 그 오랜 세월을 지내온 것이다. 세계 어느 곳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지역은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불안한 상태가 계속되어야 하는가.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을 이루어내는 길은 정녕 없단 말인가.
‘평화의 집’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북한 병사와 사진을 찍었다. 흰색과 푸른색 지붕이 보인다. 흰색은 북측이 관리하고 푸른색은 미군이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그 중 한 채를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건물 가운데로 남북 분계선이 지나간다. 똑딱 하는 사이 그냥 한 걸음 달려 분계선을 지나면 거기가 바로 남한이고, 북한 땅이다. 여기서 서울까지 약 70㎞, 자동차로 4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개성공단을 멀리서 지나치다.
개성의 아침, 출근하는 아주머니들
개성으로 올라가는 길. 멀리 왼쪽으로 개성공단이 보인다. 이 분단의 시기에 저 공업단지가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북한을 방문하기 전,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세계적 인터넷 매체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을 읽었다. ‘통일 한국의 출발점은 개성공단의 성공’이라는 제목이었다.
“남북한은 협력 프로젝트로 남북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10년 넘게 보여줬다. 개성공업지구가 숱한 풍파를 견뎌낸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최전선 지역을 개성공단 부지로 제공했다. 군부의 반대를 누르고 결단을 내렸다.
통일은 남북 공통의 목표다. 통일로 나아가는 길은 효과가 입증된 것에 기반해야 한다. 개성공단은 윈윈 프로젝트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개성공단을 확장하고 새로운 공단들을 건설해야한다. 개성공단 확장과 새 공단 건설은 통일로 가는 남북 윈윈 로드맵이다.”란 내용이었다. (2014년 9월 24일자 중앙일보 참고)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이 125개, 근무하는 근로자가 5만3천여명, 근로자 출퇴근에 280여대의 공단관리위 버스가 동원되며, 생산액이 39억 달러(4조2천724억원)에 이른다는 보도를 보았다. (2014년 12월 통계) 이번에 개성공단을 방문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성균관

개성 도착. 성균관에 도착했다. 입구에 ‘국보유적 127호’ 라는 팻말이 서있다. 그 옆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현판이 세워져있다. 성균관은 고려초엽 992년에 세우고 이조 때 고쳐지었는데 임진란 때 불에 타버려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1089년 국자감 시절부터 정식교육기관으로 정착되었다니 지금부터 926년 전의 일이다. 성균관을 <고려성균관 경공업대학>으로 명명하여 운영해 오고 있으며, 북한은 이 대학을 세계적으로 역사가 가장 오랜 대학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남한에 있는 성균관대학이 건학 6백주년을 훨씬 넘었으니 남북한을 통해 성균관이 역사적으로 민족의 고급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오고 있는 셈이다.
개성 남대문 앞,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수령 몇 백 년인지 모를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있다. 개성시 인민위원회에서 세운 돌 비석에 “…은행나무가 한 천 년 묵었다고 하는데 벌레도 먹지 않고 싱싱합니다.”는 구절이 있는 걸로 미루어 수령을 천 년쯤으로 계산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대성전과 명륜당, 동제, 서제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서울의 성균관과 건물의 배치, 규모가 비슷하다. 오랜 은행나무가 경내에 서 있는 것까지 닮았다.
자료실에 들어가 둘러보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눈에 띄었다. 고려 때, 소 한 마리 값이 비단 400필. 15살 이하 50살 이상 남자 노비는 비단 50필, 같은 나이의 여자는 비단 60필, 남자 15살 이상 50살 이하는 비단 100필, 여자는 120필이라고 적혀있다. 노예를 사고팔았다는 기록이자, 소 한 마리 값이 노비보다 훨씬 비싸게 거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그렇게 인간을 노예로 부려먹으며 사고팔고 했던 시대가 있었다.
성균관 본관 왼쪽으로 웅장한 건물이 보인다. ‘고려 성균관 대학’이다. 한옥의 특징을 살려 지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9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없었던 건물이다. 그 사이에 신축한 모양이다. 남한의 성균관대학교와 교류를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랑신부와 친구들 한 무리가 학교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결혼사진을 찍으러 가는가 보다.
천태종 성지 보광사 방문
오관산 영통사를 방문할 순서다. 개성에서 16㎞쯤 떨어진 곳이라 한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 곳곳에 호랑이, 코끼리, 등 각종 동물모양을 만들어 세워두었다.
나뭇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군인 여러 명이 나무를 곧추세워 등에 지고 한 줄로 산등성이를 올라간다. 지게를 사용하지 않고 저런 방법으로도 나뭇짐을 나를 수 있는가 보다. 옛날 월출산 산나무꾼들이 저녁나절이면 나뭇짐을 지고 줄지어 산에서 내려오던 장면이 오버랩 된다.
높은 곳에서 잠시 바라보니 요사체가 멀리 보인다. 오관산 깊은 골에 들어앉은 모습이 편안하다. 절집은 저렇게 특별한 곳을 찾아 세우는 모양이다. 절에 도착하니 스님 한 분이 반겨주신다. 이곳이 왕건의 출생지이며, 왕건의 4대 할아버지 때부터 이 골짜기에서 일가를 이루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아들을 낳으면 셋 중 하나는 스님을 만들라는 선대의 가르침을 섬겨서 의천이 중이 되었다. 그가 천태종을 창시했다. 이를테면 이곳이 천태종의 성지라는 얘기다. 천태종은 현재 일본에 500만, 남한에 200만의 신도가 있는 큰 종단이라고 한다.
1996년 민족문화유산을 발굴 정리하라는 김정일 장군의 교시를 받들어, 2천년부터 2006년 사이에 건립했다고 한다.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돌과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이며, 절 이름도 통일을 대비하면서 일본과 남한에 있는 신도를 위한 종단의 성지를 만들자는 의미에서 보광원(普光院)으로 했다고 한다. 절사寺 자가 아닌, 원院으로 정했다는 얘기였다.
스님께 세수 얼마이시냐고 물으니 예순한 살 이시란다. 옛날로 치면 꼬부랑 늙은인데, 이렇게 아직은 정정하다고, 아들딸 낳고 살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었다고 너털웃음을 웃는다. 박식한 분이다. 이 절에 스님이 몇 분이나 계신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송도(松都) 삼절(三絶) 만나러 가는 길
송도는 개성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개성을 말하면 사람들이 송도를 떠올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송도(松都)의 삼절(三絶)인 박연폭포, 화담 서경덕 선생, 그리고 황진이를 생각하게 된다.
서화담 선생의 묘가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단다. 우리가 올라왔던 반대 길을 따라 개성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려가는 길 멀지 않는 곳에 화담 선생의 묘, 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차를 세워두고 산길을 잠시 내려가자 선생의 묘가 있다. 앞은 넓은 호수요 뒤로는 오관산이 버티고 있는, 천혜의 명당이다. ‘보존유적 1761호 서경덕 묘’라는 표지석이 묘 앞에 서있다.
화담 서경덕(徐敬德)(1489~1546)은 대학자였다. 마흔셋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습 도중 그만 두고 송악산 자락 ‘꽃 피는 연못’ 옆에 초막을 짓고 일생을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화담花潭이라는 호를 붙이게 된 연유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평생을 산속에 은거하고 살았지만 정치가 정도에 어긋나면 임금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곤 했다. 그의 인물됨이 인근 개성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듣게 된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하루아침에 파계시켜 “십년공부 나무아비타불”이라는 말을 유행시키고,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놓았던 황진이가 서경덕을 유혹하기로 작정한다. 그렇지만 화담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이를 계기로 황진이는 화담의 제자가 되었다.
송도삼절(松都三絶)이란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했다. 황진이가 그런 말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하지만, 확인 할 수는 없다.
화담 선생과 황진의 관계 또한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둘 사이가 어디까지였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전해오는 글을 통해 서경덕은 가끔 황진이를 그리워했고, 황진이 또한 화담을 정인으로 마음에 새겼을 거라고 후세 사람들은 짐작한다. 다음은 화담이 남긴 시조 한 수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화담의 이 시에 대해 황진이는 곧 답을 보냈다.
"내 언제 신(信)이 없어 님을 언제 속였관데 /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화담 선생은 대학자였지만, 황진이와의 일화로 인해 더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분이다. 서경덕이 58세에 세상을 떠난다. 선생은 삶과 죽음은 다만 기(氣)의 뭉침과 흩어짐뿐이라고 했다. 한 조각구름이 일었다가 한 조각구름이 사라진 셈이다. 그때 황진이의 나이 스물일곱 이었다. 스물일곱…? 놀랍다.
산 아래 저만치 모퉁이를 돌면 황진이의 묘가 있다고 한다. 화담은 죽어서도 황진이를 내려다보며 그리워하고, 황진이는 저 아래 묻혀 화담을 올려다보며 사모하는지 모르겠다.
연암 박지원의 묘에 인사를 드리다.
화담 선생의 묘를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에 차 안에서, “화담 선생이 황진이와 잤을까요” 운전사 방 동무가 묻는다.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대 문장가인 화담이 한 여성의 사랑을 품어주지 못할 만큼 작은 위인은 아니었을 겁니다”라는 답이 나온다. 모를 일이다.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있다. 길가에 여러 개의 벌통이 놓여있고, 황소 20여마리가 냇가에서 풀을 뜯고 있다. 작은 다리 부근에서 황진이 무덤이 어디쯤인지 군인에게 길을 묻느라 잠깐 섰다. 냇물에서 빨래하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저런 풍경은 참 오랜만에 만난다. 냇물에서 빨래를 한다는 것은 물이 그만큼 깨끗하다는 의미일터이다. 왼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황진이 묘가 나올거라고 한다.
‘닭공장’ 표지가 보인다. 닭을 공업적 방법으로 기르는 곳이라고 김 참사가 설명해준다.
왼쪽으로 능이 보여 그곳으로 들어갔다. 황진이 묘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박지원의 묘’다. ‘보존유적 1740호 박지원의 묘’라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참으로 우연히 연암 박지원의 묘를 들르게 되었다.
평소 만나고 싶었던 박지원 연암 선생을 이렇게 뵙게 되었다. 알다시피 연암은 조선 실학의 대가다. 정조 때인 1780년 중국을 다녀온 다음 ‘열하일기’를 펴냈다. 그런데 최근에 그 “열하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조선 왕조 오백 년을 통틀어 단 하나의 텍스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 또 동서고금의 여행기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또한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 ”고 쓴 서문이 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만큼 기억에 남는 책이었다.
그렇게 연암 선생을 만난 다음, 얼마 전 다른 책에서 그 분이 쓴 시 한 편을 또 만났다. ‘연암억선형(燕巖億先兄)’이라는 시다. <연암이 돌아가신 형님을 생각하며>라는 시다.
“형님 수염 누구 닮았었나? / 돌아가신 아버님 그리울 때면 형님 얼굴 쳐다보았지 / 아마 형님이 아버님을 닮았었나 봐요 / 형님 돌아가셔서 형님 그리울땐 누구 쳐다보지? / 개울로 가서 두건 벗고 내 얼굴 비춰봐야 하나?”
형제간의 정한을 쉬운 언어로 풀어낸 시다. 그리고 공감을 준다. 좋은 책을 읽거나 글을 만나면 그 글을 쓴 작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근래에 연암 선생을 생각해오던 참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상면을 하게 되었다.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그리고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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