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 영암 출생설'은 구림지역 전승에서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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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왕인 영암 출생설'은 구림지역 전승에서 비롯

정성일 교수,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 분석시론'통해 부정론 반박
(사)왕인박사현창협회·왕인문화연구소 개최 2016 학술대회 성황
왕인박사 역할 재조명 개인 넘어 동북아로 담론범위 확장 큰의미
왕인박사의 '영암 출생설'은 일본 기록이나 일본인에 의해서 처음 제기된 것이 아니라 영암군 군서면 구림지역의 구비전설(口碑傳說)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같은 주장은 (사)왕인박사현창협회(회장 전석홍)가 주최하고 왕인문화연구소(소장 임영진)가 주관해 지난 12월16일 영암문화원 강당에서 '4∼5세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와 왕인박사'를 주제로 열린 2016년 학술대회에서 정성일 광주여대 교수의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 분석 시론'이라는 발표 논문에 따른 것이다.
특히 이번 학술대회는 4∼5세기 동북아시아 각국이 경쟁을 벌이면서 활발한 인적 이동이 있었고, 왕인박사의 도일(渡日)에 의미를 둬 그 역할을 재조명하는 등, 왕인이라는 개인을 넘어 동북아시아로 담론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왕인 관련 학술대회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나와 주목된다.
□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 분석 시론'
정성일 광주여대 교수는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 분석 시론'이라는 제하의 주제 발표를 통해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은 ▲이병연(1894∼1977)이 펴낸 「조선환여승람(영암군)」과 영산포 혼간지(本願寺) 주지 아오키 게이쇼(靑木惠昇)가 지은 「왕인박사 동상 건립 취지문」 등 두 가지라고 밝혔다.
정 교수는 "영암 출생설을 긍정하는 쪽이나 부정하는 쪽 모두 조선환여승람의 저자 이병연과 영산포 혼간지 주지 아오키 게이쇼에 대해 체계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면서, "영암 출생설을 부정하거나, 심지어는 '역사 날조'라는 주장에도 납득할만한 문헌근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또 조선환여승람(영암군)과 왕인박사 동상 건립 취지문의 비교를 통해 ▲조선환여승람에서는 '성기동에서 왕인박사가 태어났다'고 적고 있는데 비해, ▲왕인박사 동상 건립 취지문에서는 '왕인박사의 옛땅(舊地)이 영암군 구림의 유적'이라고 적고 있다고 소개하고, 영암 조사 시기는 ▲조선환여승람은 1910∼1922년으로 추정되고, ▲왕인박사 동상 건립 취지문은 1913년 영암포교소 이후로 추정했다. 또 인쇄 또는 발표 연도에 대해서는 ▲조선환여승람은 1937년, ▲왕인박사 동상 건립 취지문은 1932년이라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이를 토대로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을 부정하는 이들은 "이병연과 아오키 게이쇼의 만남을 통해 아오키가 이병연에게 왕인 관련 정보를 제공해줌으로써 조선환여승람에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이 실리게 됐다고 보거나, 아오키의 왕인박사 동상 건립 취지문의 발표연도가 1932년이고, 조선환여승람 간행연도가 그보다 5년 뒤인 1937년이라는 점에 주목해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은 현지의 구전이 아니라 일본 측 기록(즉 왕인박사 동상 건립 취지문)과 일본인(즉 아오키)에게 얻어들은 내용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정당하게 평가하기 어렵다고 본다"면서, "더구나 아오키 게이쇼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을 제기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정 교수는 특히 "조선환여승람에 보이는 각 지역의 명소(名所)나 명신(名臣), 명환(名宦)은 '전통의 계승'과 함께 '상업성'이라는 두 가지 출판의도를 잘 보여주는 증거"라면서, "조선환여승람(영암군)에 명소의 첫 번째 장소로 성기동(聖基洞)이 등장하고, 명환의 첫 번째 인물로 왕인이 출현하는 것은 이병연이 이 책의 주요 구매층으로 보았던 영암지역 유림들과 출향 인사들의 지역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책 속에 담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이어 "이병연이 조선환여승람을 세상에 책으로 출간해 내놓은 것은 1922년부터 1937년까지로 알려져 있다"면서, "이병연이 책을 펴내기 위해 전국 13도 129개 군을 직접 조사하거나 지방마다 보고원을 둬 조사를 개시한 것은 1910년부터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병연이 영암을 조사한 시기가 언제인지 현재로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특히 이병연이 조선환여승람에서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을 적은 부분인 영암의 명소를 소개하는 '성기동'에 주목했다.
"이병연은 성기동을 설명하면서 그곳이 '백제 고이왕 때 박사 왕인이 태어난 곳'이라고 했고, 그와 동시에 그곳이 '신라 진덕왕 때 국사 도선이 태어난 곳'이라고 적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도 현지에서는 성기동을 왕인박사 탄생지라고 보는 주장과 함께 도선 국사 탄생지로 이해하는 주장이 공존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점에 착안한다면 조선환여승람에서 성기동을 왕인박사의 탄생지로 기록한 것은 조선 유학자 이병연과 일본 승려 아오키 게이쇼의 만남의 결과라기보다는 영암주민에 의한 구전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일본 불교의 포교활동과 영암'에서도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의 흔적을 찾았다.
정 교수는 "1927년까지 영산포와 영암지역에서 이뤄진 일본 불교 포교 활동에 대해서는 그 줄거리를 어느 정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혼간지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불교의 포교 활동일지' 속에서 아오키 게이쇼에 관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1927년까지도 아오키가 영산포와 영암지역에 출현하지 않았음을 뜻한다"고 강조하면서, "영산포 혼간지 주지 아오키는 적어도 1927년 이후 아마도 193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영산포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아닐지 짐작된다"고 추정했다.
정 교수는 이어 "일본 불교 포교 활동 일지 속에 이병연을 비롯한 조선 유학자의 모습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면서, "광주와 목포지역 포교 활동에서는 물론이고 영산포 포교소와 영암 포교소 기록 속에서도 조선 유학자 이병연이 등장하지 않는다. 더구나 왕인박사나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에 관한 언급이 일본 불교 포교 기록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을 일본 불교 포교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일본 승려 아오키 게이쇼의 영향을 받아 조선 유학자 이병연이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을 주장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다.
결국 정 교수는 "이병연을 비롯한 보고원들이 영암지역 조사과정에서 그곳 주민들에 의해 구비전설(口碑傳說)로 전해 내려오던 왕인박사 영암 출생설을 접하고 그것을 조선환여승람(영암군)에 수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면서, "1927년 이후 영산포와 영암의 혼간지 포교소 활동 기록이 아직까지 학계에 소개되지 않아 1930년대 아오키 게이쇼의 활동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아오키가 수용한 왕인박사 영암 탄생설은 그의 포교 활동 과정에서 현지 주민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는 개연성은 어느 정도 확인된다"고 결론지었다.
□ 4∼5세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와 왕인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이주현 교수(한남대)가 '4∼5세기 중국의 대외교류정책'이라는 기조발표를 했으며, 김기섭 한성백제박물관 전시기획과장이 '4∼5세기 국제정세와 백제의 외교정책'에 대해, 백승옥 국립해양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4∼5세기 倭國의 대외교류'에 대해, 임영진 교수(전남대)가 '倭五王의 중국 견사 항로와 전남지역 왜계고분'에 대해 각각 주제발표를 했다. 또 박광순 교수(대한민국학술원)와 정재윤 교수(공주대), 문안식 전남문화재 연구소장 등이 참여해 종합토론을 벌였다.
특히 정재윤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는 4∼5세기 동북아시아 각국이 경쟁을 벌이면서 활발한 인적이동이 있었고, 특히 왕인박사의 도일(渡日)에 의미를 두어 그 역할을 재조명하는데 그 목적을 뒀다"면서, "왕인이라는 개인을 넘어 동북아시아라는 거대한 담론으로 확장시킨 것은 매우 바람직한 접근이며, 학술대회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사)왕인박사현창협회 전석홍 회장도 "4∼5세기 한중일 3국 사이의 역동적인 국제정세를 살펴보는 한편 당시 왕인박사가 행했던 역할과 그 역사적 의미를 논해보고자 했다"면서, "왕인박사의 도일과 다방면에 걸친 활동들은 단순한 문물의 전파나 문화의 교류를 넘어 당시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를 살펴보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이날 이주현 교수는 '4∼5세기 중국의 대외교류정책' 기조발표를 통해 "4세기 후반에 수립된 외국 군주에 대한 장군호 수여는 문헌기록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백제 무령왕릉의 묘지명에서 확인되는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라는 사례나 전북 고창의 백제고분에서 출토된 '복의장군(伏義將軍)' 청동인장에서 문물자료로 확인된다"면서 "이러한 양상을 장군외교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적합하다"고 강조했다.
김기섭 한성백제박물관 전시기획과장은 '4∼5세기 국제정세와 백제의 외교정책' 주제발표를 통해 "백제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 해양문화가 발전했다. 그래서 백제의 지배층은 조상이 서로 다르고 문화전통이 다른 사람들, 모여든 사연이 서로 다르고 목적이 다른 사람들, 언제든 바다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사람들을 백제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할 수 있었다"면서, "그들은 '통합의 리더'였다"고 강조했다.
백승옥 국립해양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4∼5세기 倭國의 대외교류' 주제발표를 통해 "왜의 성장은 가야제국과 백제 등 한반도 선진지역에서의 문물 수입과 선진 도래인(渡來人)들의 활약 때문이었다"면서, "왕인박사도 선진 도래인의 한 사람이었으며, 왜국의 왕권과 국가 성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문명인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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