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는 내가 대학 3학년 때 돌아가셨다. 가난한 서생이었던 아버지, 올망졸망 일곱 남매를 혼자 키워 낼 일을 생각하며 기가 막혔을, 아직은 젊은 어머니의 심정을 나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 어머니는 이따끔 술이라도 한 잔 드시면 "느그 아부지 만나각고…"하시며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홀홀단신 일본에 건너가 힘들게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시골 청년을 만나 결혼 했다는데,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는 '참 멋대가리 없는' 분이었다. 그렇지만 그 말 속에는 아이들 낳아 기르면서 살아온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정이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식을 위해 억척으로 사시다가 어머니는 몇 년 전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어머니가 남긴 유품은 두 가지였다. 두 분의 결혼식 사진과 대학노트 한 권 분량의 아버지 문집이다. 그 오랜 세월 시골에서 서울로 셋방에서 셋방으로 숱한 이사를 하면서도 분실되지 않고 나에게 전달된 유물이었다. 큰 형이 문집을 간직하는 게 좋겠다고 동생들이 권하기에 미국으로 가져왔다.
문집을 살펴보던 중, 아버지 글을 중심으로 가족 문집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 아버지에 관해 내가 아는 게 너무 적었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셨다는 사실 뿐 어느 학교를 언제 졸업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해 줄만한 분을 수소문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근무했던 학교의 지역 교육청에 아버지의 이력서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어렵게 이력서 한 통을 구했다.
금년 봄. 아버지가 졸업한 학교를 찾아 일본 오사카를 방문했다. 그곳에 가면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지 교육국을 방문하여 학교는 알아냈지만 건물은 전쟁통에 불타버려 형체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머잖은 곳에 한인 상가가 있었다. 여기서 일하며 학교에 다니지 않으셨을까. 이 길목 어디쯤 아버지 체취가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 골목 골목을 천천히 한참동안 기웃거렸다.
아버지. 내가 살아온 날을 돌이켜보면 그 궤적이 아버지와 놀라울 만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발자취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부지'라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퇴근해 집에 올때면, 아빠! 하고 달려와 품에 안기곤 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다음, 녀석들도 "아빠!"라는 말을 생각하며 제 아비를 그리워나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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