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 기념사업회 발족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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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산 기념사업회 발족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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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9일 국회헌법헌정기년관에서 이철승 헌정회회장, 김형오 국회의장(박계동 사무총장 대독), 김문석 가락대종친회회장 등 200여인이 모여 낭산김준연선생 기념사업회를 엄정하게 재발족시켰다.
실로 1994년 발족한 기념사업회가 “건국의 원훈 낭산김준연” 의 책 한권을 발간하고 휴면상태에 있었던것이 오랜만에 다시 활력을 찾는 것이다. 역사는 쓰여지는 것이고 인물은 받드는것이라는 속언이 있다.
아무리 큰 사건이나 큰 인물도 후세인이 기록하고 받들지 않는한 시간속에 묻혀지기 마련이다.
낭산김준연선생은 참으로 크고 본받아야 할 선각자이시지만 그동안 너무 소홀하게 취급되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고, 오히려 부정적인면만 부각되는것은 아쉬운 일이다.
첫째, 낭산은 한국인들이 최고 학부 출세를 지상가치로 아는 현실에서는 자랑스러운 성공스토리이다.
한반도 끝인 영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침탈당할때 조선 최고 명문 경기고보에 입학 수석으로 졸업하고, 당시 장학금으로 엘리트코스인 오카야마 제6고보를 나와 동경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셨다.
동대 졸업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정치학과 조교일때 일본 정부가 단 세명 뽑는 장학생중 하나로 베를린대학을 거쳐 영국 런던대학까지 유학한 최고 학벌소유자였다.
둘째, 낭산은 동경대학등 일본정부 지원을 받았음에도 철두철미 오로지 한민족의 독립과 자력갱생을 추구하셨다.
외국 유학시는 물론 귀국후 조선공산당(ML당사건)으로 7년 조선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년등 8년가 투옥되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시 한국인 최초 올림픽영웅인 손기정 일장기말살사건을 일으키신분이다.
1945 일본패전시 아베총리가 낭산과 고하에게 총독부정권 인수를 간청하였으나 조선민족의 운명은 조선 민족이 결정하지 일본 총독부가 하는 일이 아니라고 단호히 거부한다.
셋째,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시 두가지로 결정적 기여를 하신다.
당시 미쏘의 조정을 받는 좌우익 극심한 투쟁과정에서 자유와 민주를 기본가치로하는 민족진영에서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는 물론 이승만대통령 등과 협력 민족진영 중심의 건국투쟁에 앞장선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적 전통이 일천함에도 제헌국회시 헌법기초의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헌법초안을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당시 헌법기초 위원회 위원장은 대구출신 서상일 이었으나, 이는 호남중심의 한민당이 영남을 배려하고 낭산보다 몇살위이기 때문이었다.
건국초 많은 기초법률을 제정시 낭산이 중심축을 이루었다.
농지개법은 당시 공산당 전력이 있는 죽산 조봉안 농림부장관이 입법을 망설이자 낭산이 나서서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정착하기 위하여는 농민에게 토지가 분배되는 농지토지개혁만이 공산화를 막는 길이라는 소신과 농촌출신으로서 농민을 위하는 마음에서 손수 입법을 하였다.
넷째, 낭산은 격동뒤에 시대적 변화와 과제를 통찰하는 정치인이다.
건국초 한민당 소속으로서는 앞장서 이승만 박사와 유대관계를 갖다가 자유당정권이 일인 독재체제로 변하자 다시 과감히 비판적 야당의 길을 택한다. 더구나 타계하시기 전에는 당신이 민주당구파임에도 신파 출신의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결단을 내리는 항상 시대적 양심과 통찰력을 갖으신 분이다.
끝으로 이같은 낭산은 정치적 거목이었음에도 부정부패를 모르고 가난을 벗삼는 분이셨다. 돌아가실때 중절모하나 옷 두벌, 구두 두 켤레, 지팡이 하나로 거의 무소유로 일생을 마치신분이다.
오늘날 크고 작은 정치인치고 돈과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않는 분이 없고 지역에서도 간교한 토색질을 일삼을때 깨끗한 선비이자 청렴한 정치인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다.
이에 우리는 선각자들을 제대로 평가하여 받들고 특히 지역사회에 자랑스러운 역사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라도 낭산과 같은 족적을 남기신분은 비록 고향에 후손이 없고 남겨진 재산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기념사업을 추진하는것은 그 의미가 크다고 볼수 있다.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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