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현 도포면장 |
1555년 5월 15일경 영암 각 마을에 붙은 의병장 양달사의 격문은 필시 이런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5월 11일 70여척의 왜선이 달량포로 침입하여 5월 13일 달량성이 점령당한 이틀 후의 일입니다.
어머니 상을 당해 해남현감 직을 내려놓고 시묘살이를 하던 그는 전라도를 유린하는 왜구에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진영의 군관(軍官)과 훈련원습독관(현재의 사관학교 교관) 등을 지내면서 10여년 동안 갈고닦은 무술로 의병들을 훈련시켜, 5월 25일 영암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대첩을 거둔 것입니다.
이날의 전투로 왜구는 도망갔지만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전사자만 510여명에 사망자와 부상자도 부지기수였고, 납치당해 노예로 팔려간 부녀자와 어린아이도 수천이 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병장이라는 신분이어선지 양달사 의병장의 활약은 조정에 보고되지 않았고, 포전(褒典)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1555년 12월 2일 명종실록에 포상의 불공정을 한탄한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가고(有功達泗歸何處)"라는 싯구가 한 줄 남아 있을 뿐입니다. 여지도서, 호남읍지 등 향사(鄕史)에 그의 기록이 남아 있지만 현재까지도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는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 있습니다. 그의 전설이 깃든 장독샘(將纛泉)과 공적비가 영암군청 앞에 덩그렇게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지방이 모여 국가가 되듯이 향사가 모여 역사가 됩니다. 1천여년 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방화와 약탈과 살육과 납치를 일삼던 왜구를 잊고 살았기에 우리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었고, 조선 말에는 식민지가 되었으며, 금년에는 경제적인 굴욕을 겪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는 9월 25일(수) 11시 영암군민회관에서 양달사 현창사업회 창립총회를 개최합니다. 이제라도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를 제자리에 모시고,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려 합니다. 가급적 회원으로 참여하여 왜구의 칼날에 돌아가신 선조들의 원혼을 위로하고, 양달사의 충혼을 기리는 뜻깊은 자리를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