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군민이 뽑은 영암의 대표, 양달사와 조극환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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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군민이 뽑은 영암의 대표, 양달사와 조극환을 추억하며

이영현 소설가
757년(신라 경덕왕16년) 12월. 월나군(月奈郡)이 영암군으로 바뀐 이래로 영암군민들에 의해 영암군의 대표로 선출된 분이 두 분 있습니다. 관선 대표가 아닌 민선 대표가 해방 이전에도 두 분이나 있었다는 얘깁니다. 한 분은 바로 을묘왜변이 발생한 1555년 5월 13일부터 25일까지 약 12일간 호남 의병장으로 활동한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梁達泗)이고, 또 한 분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부터 1945년 12월까지 약 4개월간 건국준비위원회 영암지부 위원장으로서 군수직을 수행한 독립운동가 조극환(曺克煥) 선생입니다.
먼저, 을묘왜변이 발발한 1555년 5월 13일 달량성 전투에서 이덕견 영암군수가 항복해 버리는 바람에 영암은 불쌍한 군이 돼 버렸습니다. 6천여 왜구가 파죽지세로 몰려오고 있는 판에 백성을 지켜줄 군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라관찰사 김주가 전주부윤 이윤경을 임시로 내려보냈지만 성안에만 있었습니다. 성 밖의 백성들은 그저 산속으로 도망가거나 피난을 가거나 그대로 앉아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때 영암 백성들은 도포에서 어머니 시묘살이를 하던 양달사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함께 싸울 것을 결의하였고, 그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70여 척의 배를 몰고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의 상황도 참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본인 군수가 도망가 버린 뒤, 일제에게 고초를 당했던 반제국주의 세력들과 일제 앞잡이들 간의 대립으로 우리 영암은 무질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때 영암의 정치 안정과 치안 회복을 위해 당시 지도층 인사들은 1919년 4월 10일 영암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조극환 선생을 건준 위원장으로 추대했습니다. 1945년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위원회로 바뀐 후에도 조극환 선생은 영암군수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분들의 울분을 다독거리면서 민생의 안정과 군민의 계몽에 힘썼습니다.
하지만,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영암군민들은 이 두 분을 역사에서 지워 버립니다. 1555년 5월 25일 영암성 대첩으로 왜구가 퇴각한 후 조정과 영암군 등 관에서는 양달사 의병장의 모든 기록을 지우기에 급급했습니다. 당시 조정의 논공행상에 화가 난 어느 시인이 영암도 아닌 장흥의 바람벽에 붙인 시구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유일한 기록이고, 제가 지난해 11월 <바람벽에 쓴 시>라는 소설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합니다.
조극환 선생의 말년도 마찬가지입니다. 1945년 12월 12일, 미 군정의 인민위원회 해산 명령을 하달받고 집으로 돌아간 선생에게 '영암군의 빨갱이는 전부 조극환이가 만들었다'는 비난만이 무성했습니다. 지금의 송평리 이화정에서 소금을 구워 생계를 이어가던 선생은 6·25 때는 인민군의 온갖 회유에도 나서기를 거부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우리 영암과 영암군민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가 쓸쓸히 이승을 떠났습니다.
물론 양달사는 전라도 유림들의 지속적인 건의로 1847년 좌승지로 추증되었고, 조극환은 1990년 독립훈장 애족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기 직전까지 그분들이 영암군과 영암군민들에게 느꼈을 아쉬움과 서글픔과 자조감, 그리고 추증되거나 애족장을 받기까지 후손들이 곱씹었을 울분과 서운함은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할까요?
1974년 6월 도포면 역사상 가장 큰 행사가 열렸습니다. 김연수 영암군수가 허련 도지사와 강기천, 길전식 국회의원을 고문으로, 영암군의 주요 기관사회단체장을 위원으로 위촉하여 1천여명의 군민이 참석한 가운데 양달사가 시묘살이를 했던 어머니의 묘 앞에 순국비를 세운 것입니다. 이름하여 '호남창의영수 양달사선생 순국비'입니다, 을묘왜변 419년 만의 일입니다.
1984년 4월 10일 오전 10시 영암공원에서는 동아일보 김상기 사장과 김준혁 영암 3·1운동기념비 건립위원회 주관으로 봉석호 영암군수를 비롯한 기관사회단체장과 1천여명의 군민이 모여 '3·1운동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조극환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25인을 잊지 말자고 세운, 그마저도 동아일보사가 '3·1운동유적지 보존 운동'의 열 번째 지역으로 우리 영암을 지목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세운 다소 슬픈 기념비였습니다.
하지만 비를 세운 이후로 영암군민들은 두 분을 역사의 그늘 속에 더욱 깊이 묻어 버립니다. 현재 두 분에 대해 알고 있는 영암군민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도 없습니다.
흔히들 지금은 지방정부 시대라고 합니다. 상급 기관이나 외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우리 군민들 스스로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분은 존경해도 상관없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왕인박사와 도선국사, 최지몽, 김준연 등 영암의 인물사를 얘기할 때 우리 영암군민과 영암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 두 분도 충분히 낄 자격이 있지 않는가 해서 드리는 얘기입니다. 을묘왜변 당시 조정과 영암군에서 외면했다고 해서 양달사를 우리가 계속 멀리하고, 일제와 미 군정과 독재자들이 공산주의자로 취급했다고 해서 우리마저 조극환 선생을 계속 빨갱이로 몬다면 그분들 덕분에 목숨을 건진 조상님들의 눈에 우리 후손들이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요? 양달사와 조극환, 영암군민이라면 이 두 분만은 좀 기억하고 삽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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