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 前) 영암군 신북면장 前) 전라남도 노인복지과장 前) 완도부군수 |
노비란 남성인 노(奴)와 여성인 비(婢)를 합친 단어로서, 공노비(公奴婢)와 사노비(私奴婢)로 구분되었는데, 공노비는 국가기관에 묶인 노비를 말하고 사노비는 개인에게 속박된 노비를 말한다. 또 노비는 노동을 바치는 형태에 따라 입역노비(立役奴婢)와 납공노비(納貢奴婢)로 나뉘었다. 입역노비는 주인집 가까이 살면서 주인집 일을 하는 노비를 말하고, 납공노비는 주인과 멀리 떨어져 주인집 땅을 관리하고 살면서 노동과 생산된 수확물을 주인에게 바치는 노비를 말한다.
조선시대에 노비는 전체 인구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놀랍게도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인구가 대략 1,000만 정도였으니까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하니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노비가 처음부터 이처럼 많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인 695년 서원경(西原京 지금의 청주) 4개 촌락을 조사한 문서를 보면 460명의 인구 중 28명이 노비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니 노비의 비율이 6% 정도로 보여진다. 조선을 개국하기 직전 이성계의 식읍(食邑)에 관한 기록을 보더라도 식읍인구 162명 중 노비는 7명으로 4% 정도에 불과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조선왕조 개국 이후 전체 인구의 약 40%가 노비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왜 조선시대에 노비가 급증하게 되었을까? 고려시대까지는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명만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되도록 하였으나 양천교혼(良賤交婚), 즉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불법으로 엄격히 규제하여 노비는 노비끼리만 결혼하도록 함으로서 노비 숫자가 크게 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체 인구의 10%정도에 불과한 양반관료들이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자 노비의 수를 늘리기 위해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허용하고 이를 권장하여 이들이 낳은 자식들을 일천즉천(一賤則賤)에 따라 노비로 만들어 노비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들 양반들은 수백명씩의 노비를 거느렸는데 퇴계 이황의 장남은 360여명, 문신이자 시인인 윤선도 집안에서는 700여명,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은 한양에 300여명, 지방에 수천명,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은 무려 1만여명의 노비를 거느렸다고 한다.
당시의 노비는 토지와 마찬가지로 상속되고 매매되는 재산이었다. 당시 남자 노비 매매가격이 오승포(품질이 중간 정도 되는 베) 150필이었는데 말한필 가격이 400필로서 사람의 몸값이 가축만도 못하였고 노비를 셀 때도 명(名),인(人)을 쓰지 않고 가축이나 시체를 셀 때 쓰던 구(口)를 썼다고 한다.
조선시대 노비 수가 증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병역과 세금을 담당해야 할 양인의 숫자가 감소하여 국방과 국가재정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비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영조때인 1731년 남성 노비와 양인 여성 사이에서 낳은 자녀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아닌 양인이 되도록 하는 종모법(從母法)을 시행하여 노비수가 즐어들게 되었고, 순조 1년인 1801년에는 공노비가 해방되었으며 1886년에는 노비세습제가 폐지되고 1894년 갑오경장으로 노비는 마침내 제도적으로 완전 폐지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민중들의 자유를 향한 투쟁으로 전진한다고 말한다. 전체인구의 10%에 불과한 양반관료들이 그들의 양반경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체인구의 40%가 넘는 노비들을 신분이라는 올가미를 걸어 지배하면서 인권을 박탈하고 노동력을 착취했던 비참했던 조선의 노비제도는 노비들의 저항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폐지되었다.
그러면 노비제도가 폐지된 지금 우리 사회는 평등한 사회가 되었을까? 민중이라는 개념은 정형적이고 불변의 개념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지배계급이 나타나고 그 지배계급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토지가 지배를 했고 신분이 지배를 했고 이제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자본에 굴복되고 예속되어 우리 자신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스스로 새로운 자아를 정립함으로서 민중이 승리하는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