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불멸의 금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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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영암의 「불멸의 금자탑」

이영현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1924년 7월 1일 오후 5시 50분, 영암보통학교(현 영암초등학교) 미야시타모수케(宮下茂輔) 교장이 자살했다. 1922년 7월 14일, 영암보통학교 휴학동맹이 보통학교로서 남북한 통틀어 전국 최초였던 데다가, 당시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2년 만에 학생들이 다시 휴학동맹을 단행하자 교장이 자살한 것이었다. 교장의 자살! 더욱이 일본인 교장의 엽총 자살은 전국적인 뉴스가 되었고, 당시 서울의 교장들은 급히 모임을 갖고 휴학동맹으로 교장이 자살하거나 사직하지 말자는 결의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전국 최초의 보통학교 휴학동맹은 왜 영암에서 일어났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잘 알려져있듯이 영암보통학교는 우리 영암군 최초의 신식교육기관으로, 1908년 4월 1일 현재의 영암향교 정문 한쪽에 간판을 걸고 문을 열었다. 1909년 2월 18일 한성사범학교를 마친 석초 조극환 선생은 영암보통학교 부훈도로 발령받았다. 그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총에 이등박문이 죽자, 영암군에서는 현 영암공원에 사죄단(謝罪壇)을 마련하고 학생들에게 사죄를 하도록 명하였는데, 당시 2학년이었던 제자 한현상(2022년 1월 14일자 낭산로에서 '자랑스러운 영암인 한현상' 참고)은 조극환 선생의 목소리가 숨이 끊어질 듯 고통스러웠다고 적고 있다. 이 조극환 선생의 제자가 낭산 김준연, 김준오(낭산 동생, 제2대 영암초 교장), 김진용(서울시의회 초대의장), 김봉근, 한현상 등이고, 김준오의 제자가 1922년 7월 휴학동맹을 주도한 박종환(제4대 영암군수), 한만상(한현상의 동생), 김준현, 김준차 등이다. 이처럼 영암보통학교가 휴학동맹의 성지가 된 이유는 500여 일본인이 살고 있던 영암 땅에 1919년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조극환 선생의 조국 독립의 의지가 제자들에게서 다음 제자들에게로 불꽃처럼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1922년 7월, 영암보통학교 교사였던 김준오는 당시의 충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광주학생사건보다도 6년이나 앞섰으니 일인(日人)들이 대경실색하였을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광주학생사건에 비하여 소규모였고, 세간에 널리 전파되지 못하여 반응이 없었지만 소학생으로서의 항일투쟁에 있어서 효시였다. 석초 조극환 선생님이 기미독립운동의 봉화를 들었고, 학생의 일부분이 가담한 일이 있었으나 5학년이 중심이 되어 가지고 4학년까지 가담하여 주도면밀하게 단행하였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행위였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학생은 소년단에 가입하게 하지 말라, 조선인을 무시하지 말라. 학생을 구타하지 말라, 조선어 노래를 가르쳐라. 조선어로 수업해라. 조선 역사를 가르쳐 달라' 등등이었다.
영암 사회의 분위기는 극도로 뒤숭숭했다. 학교를 통솔하던 영암군수는 박종환, 한만상을 주모자로 밝혀내고, 그들의 배후로 한만상의 형인 목포영흥학교 교사 한현상을 지목하였고, 10월 13일부로 한현상은 파직당했다. 한현상과 인척간이었던 김준오도 능주(현 화순) 보통학교로 전근되었다가 1924년 일본의 교육제도에 불만을 품고 4월 1일 사직계를 제출했다.
김준오로부터 교장의 자살 얘기를 좀더 들어보자. "고향에 돌아와 영암청년회장에 당선되었고, 낭주학원을 창설하여 책임자로 근무하였었다. 같은 해 6월 30일 병영 정구 시합에서 영암소년단이 우승하여 와서 향교 광장에서 기쁨이 넘쳐서 뛰고 놀고 있었으므로 구경하고 있은즉, 미야시타(宮下茂輔) 교장이 (중략) 찾아와서 금일 석양에 댁에 있겠는가고 묻기에, 그렇겠다고 하였고, 혹 내방할까 하여 기다렸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교장 자결이라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 본즉 타계하고 말았다."
그리고 일제의 모진 압제에서 벗어나 동족상잔의 아픔까지 겪은 1957년, 조극환 선생의 요청으로 쓴 영암군향토사 발간 소감문에서 김준오는 당시의 사건을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동맹휴학도 초등교육계에 있어서 효시였거니와 더구나, 맹휴로 인한 교장의 자결이라고 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우리의 피 속에는 단군성조의 피가 흐르고 투철한 민족의식이 약동하고 있다(중략). 다수의 인재를 배출한 영암교에는 선배들의 굳센 의지의 조류가 무형 중에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36여 년 전의 맹휴를 '불멸의 금자탑'이라고 명명하는 바이다."
오늘은 2022년 3월, 영암군 교육사의 큰 기둥이자 어른인 김준오가 자랑스럽게 명명한 영암초의 '불멸의 금자탑'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월 한 달만이라도 조극환 선생과 제자들이 이등박문의 제단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해야 했던 서러움과, 당시 영암보통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교장과 맞서 싸운 이유를 곰곰이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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