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현 영암읍도시재생주민협의체 위원장 스마트영어학원(영암읍) 학원장 |
지금으로부터 468년 전인 조선 명종 10년(1555년, 乙卯)에 있었던 '을묘왜변'의 가장 핵심적인 전투였던 영암성 대첩은 영암 사람들의 운명을 구하고, 조선의 운명을 구했던 대사건으로 바로 우리 고장 '영암'에서 실재했던 일이었다. 을묘왜변이라는 큰 사건이 있어서 조선은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을 개발하였고, 속도는 빠르지만 낮은 갑판을 가진 일본의 주력선인 세키부네(關船)에 대해 해전에서 우위를 가질 수 있도록 갑판을 높인 판옥선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을묘왜변이 없었다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과연 왜군에 대항해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이순신이 없던 정유재란에 잠시 치욕의 역사를 쓰긴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바다는 온전히 이순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을묘왜변의 한 사건일 수 있지만, '영암성 대첩'은 왜적들이 완도, 진도, 장흥 등을 차례로 침탈하면서 나주를 거쳐 전라도의 본영이 있는 전주성으로 향하려던 왜적들의 침로를 차단, 격퇴하였던 중요한 전투였다. 그 전투의 중심에는 해남현감을 지내던 중 모친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던 도포 봉호정 사람 '양달사'가 있었다. 양달사는 왜구들이 곧 영암으로 밀어닥칠 것을 예상하여 그의 형제들과 함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일찍이 20세 약관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던 양달사는 영암군민들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영암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5월 24일 새벽, 지금은 포구의 흔적이 다 사라져버렸지만, 고려 태조 왕건의 역사에도 등장하는 영암 덕진포(영암읍과 덕진면 사이)에 왜적선이 나타났다. 포구에 상륙한 왜적들은 곧장 영암성을 포위하고 동문 밖 향교에 터를 잡았다. 민가에 불을 지르고, 미쳐 성안으로 피난하지 못한 영암 백성들을 살해하면서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있었다.
전라도를 관할하던 관찰사는 영암성의 중요성을 알고 전주 부윤(府尹)을 파견하여 왜적의 침로를 차단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왜적의 기세에 겁을 먹은 부윤은 맞서 싸울 엄두는 내지 못하고, 영암성 세 개의 대문(동문, 서문, 남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왜적의 패악질을 내려다만 보면서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이에 의분을 느낀 양달사는 5월 24일 밤 의병대를 향교 뒤 범바우산에 매복하게 하였다. 다음날(5월 25일) 미리 선발된 창우대(사당패)가 왜적들 앞에서 굿판을 벌리고, 그들의 공연을 보느라 방심한 사이 왜적들을 향해 기습하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한 왜적들은 향교에서 대패하였고, 도망가는 왜적들을 군더리 방죽(현 공설운동장)에 몰아넣어 또 한 번의 소탕전을 벌였다. 그러나 6,000여명이 넘었던 왜적들을 모두 섬멸할 수는 없었다. 영암에서 크게 패해 덕진포를 떠나 바다로 향했던 왜적의 잔당들은 약탈을 위해 제주도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군·관·민이 하나로 뭉친 제주사람들은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전을 거둔다. 역사(명종실록)는 이 전쟁을 '제주대첩'이라 기록하고 있다. 6,000여명의 왜적에 맞섰던 영암성 전투는 잊혀지고, 영암에서 패한 잔당들과의 전투는 제주대첩이라는 명칭으로 역사에까지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군·관·민이 하나로 뭉친 제주와 달리 영암성 대첩은 의병이 중심이 되어 승리를 거뒀다는 차이가 있다.
<제주연구원>에서는 올해 1월 3일에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이라는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저술에는 왜구 연구가인 윤성익 박사, 조선시대 제주연구가인 홍기표, 오수정, 김석윤 박사 등과 역사문화콘텐츠 등을 연구하고 있는 김형훈, 현혜경 박사 등이 참여하였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저술되었는데, 첫째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의 왜구에 대한 조명, 둘째는 을묘왜변과 제주사회에 대한 조명, 셋째는 을묘왜변 제주대첩과 주요 인물에 대한 조명, 마지막으로 넷째는 을묘왜변 제주대첩과 콘텐츠화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영암성 대첩보다 더 적은 규모의 전투였던 제주대첩은 그들의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행정까지 나서서 세미나 등을 열어 그 결과물로 단행본까지 출간하였다.
대부분의 영암사람들은 영암성 대첩에 대해 잘 모르고 있지만, 이제라도 영암에서 실재하였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찾아 그 역사를 배우고, 홍보하여 후대에까지 길이 남기기 위해 나서야할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첫째, 영암성 대첩을 기념하는 날을 정하는 것이다. 일례로 부산은 임진년(1592년)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 해전 승전일을 기리기 위해 그 날을 부산시민의 날(양력 10월 5일)로 정하여 매년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둘째, '영암성 대첩'에 대해 연구하고 꾸준히 홍보할 수 있는 '기념사업회'를 발족하는 일이다. 행정에서 곧바로 진행할 수 없으면 관심이 있는 민간사회단체를 지원해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영암의 몇 단체들이 협업하여 일을 추진하고 행정이 보조를 해준다면 보다 더 용이하게 기념사업회 추진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주와 협업하는 것이다. 을묘왜변은 크게 영암과 제주에서 왜적을 상대로 승전을 거뒀던 크나큰 전쟁이었다. 영암을 빼고 제주만으로 을묘왜변을 논할 수 없고, 또한 제주를 빼고 영암만으로 을묘왜변을 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제주와의 협업을 통해 그들이 연구하였던 결과물을 배우고, 우리가 가진 자료들을 공유해 함께 연구해 나간다면 영암성 대첩과 을묘왜변에 대한 더 큰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암군은 민선 8기에 들어서면서 '영암문화재단'을 새롭게 '영암문화관광재단'으로 탈바꿈할 계획을 실행하면서 영암의 역사, 문화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민선 8기 영암군과 새로 들어설 문화관광재단에 제안하자면, 영암 백성을 구하고, 조선의 백성을 구했던 영암성 대첩, 그리고 그 대첩을 이끌었던 잊혀진 영웅인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에 대한 연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영암성 대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나가는 동안 영암을 대표하는 관광 상품으로 '영암성 대첩 축제'를 기획할 수 있을 것이고, 연구의 결과 중 하나로 양달사 의병장에 대해 '조선 최초 의병장'이라는 수식어가 공식적으로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