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현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영암학회 회장 소설가 |
사건은 전설에서 시작된다. 태고적 월출산 구정봉에 세 개의 동석이 있었는데, 중국의 요승이 나타나 부적으로 삼동석을 떨어뜨렸다. 하나는 자연스럽게 올라갔지만 영암의 지맥들이 끊기면서 고을이 날로 피폐해졌다. 요승이 다녀간 지 200여년이 지나서야 구림에서 태어난 도선국사는 낙심하고 있는 영암군민들에게 지맥을 보익하면 된다고 말했다. 어느 곳을 어떻게 보익하면 되는지도 자세히 알려주었다. 하지만, 돈과 인력이 많이 소요되어 아무도 시행하지 못하다가 1663년에 부임한 이세익 군수의 의지로 우리 영암은 다시금 활력이 넘치는 명당고을이 된 것이다. 1653년 조정에서 도선국사의 도참사상 위에 조성된 한양의 왕도 기운을 진작시키고 양대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범국가적으로 도선수미비(道詵守眉碑)를 건립했다면, 12년 후인 1665년에는 이세익 군수가 우리 영암이 도선국사의 비보풍수 사상을 기반으로 조성된 불국토임을 환기시키면서, 도선국사의 말씀이라고 전해지는 도선국사답산기대로 지맥을 되살려 군민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이세익 군수가 과단성 있게 1천 백년 동안 못한 일을 단행하여 하루이틀 사이에 일을 성사시켜, 천년 전 하늘이 내린 맥을 보여준 것이고, 천지가 새롭게 흥기함에 영암고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덕을 모두 갖추기에 이르렀다(李候一過斷行千百年未行之盛事一日二日之間完千年前天作地脈至於與天地俱終不朽之德)」라는 대목이 바로 이런 뜻이다.
필자가 오늘 소개한 도선국사답산기는 1963년 영암군지 첫페이지에 수록된 글이다. 그리고 이 군지의 초안이 도광 25년(1845년)에 작성된 것으로 봐서 이 도선국사답산기는 1845년 이전에 존재했다. 특히 각 방향을 가리키는 용어들이 1096년(고려 숙종 원년) 김위제(金謂?)가 도성을 남경(현 서울)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면서 소개한 도선비기와 비슷한 점과, 1653년 도선수미비 에 기록된 도갑사 동지승(同知僧) 각명(覺明)과 첨지승(僉知僧) 천선(天仙) 등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 이세익 군수가 1663년 8월부터 1666년까지 실제로 재임했던 것으로 보아 이 도선국사답산기는 도선수미비 건립 이전부터 우리 영암의 유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우리 영암 출신의 도선국사는 도갑사만 건립한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영암을 지키며 대대손손 잘 살 수 있도록 지맥보익사업의 방법을 일러준 애향선승(愛鄕禪僧)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한결같이 도선국사를 존경하면서 살아왔으며, 그래서인지 1963년 영암군지에는 영암의 건치연혁(建置沿革)보다 도선국사답산기가 먼저 등장한다.
최근 도선국사답산기를 잘 아시는 어른 몇 분이 1929년에 일제가 강제로 옮긴 군청을 제자리(현 영암성당터)로 이전하는 게 어떻겠는가, 영암의 양유지(兩乳池, 젖줄)인 군더리방죽과 회현방죽을 복구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영암군수에게 건의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저었다. 도선국사답산기를 보면 영암군은 아직도 젊음이 넘치는 흥성한 고을이다. 이번에 이 답산기를 소개한 목적은 바로 이점을 확인시키면서, 군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358년 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후손들을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비보사업을 하였던 장면을 소개하면서 이글을 마무리하겠다. 「다들 적극적으로 힘을 쏟았다. 춤을 추듯이 기뻐하면서 흙을 퍼담고 모래를 지고 날랐다. 어깨를 부딪치고 다리를 스치면서 남보다 앞장서서 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皆自銳氣戮力歡欣勇躍?土搏沙以負以築肩磨踵接莫不以居先爲務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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