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 어머님 나이 23세 어머님의 뱃속에는 6개월 된 유복자인 내가 있었다. 23세 꽃다운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나의 어머님은 아버지의 시신을 흙구덩이 속에 엉클어진 피바다 속에서 손수 지어준 옷과 금이빨을 보고 시신을 수습하여 근방에 가 묘 장했다가 3년이 지난 후 지금에 묘소에 안장하여 어린 남매를 보고 인고에 삶을 사셨다.
나와 누나는 아버지가 없기에 아버지가 있는 가정이 너무도 부러웠다. 특히 초등학교 운동회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온 가족이 점심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갈 때 우리 가족은 나무 밑에서 차가운 도시락을 먹을 때 너무도 초라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은 자기 아버지가 방패연을 만들어주어 하늘 높이 날리는데 나는 방패연을 만들지 못하기에 대신 가오리연을 만들어 난리여 이를 지켜보시는 우리 어머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아버지 난 가난과 배고픔 아버지의 사랑에 메말라 너무도 빨리 철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가 되면 네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자고 다짐하였고 폐암에 걸려 생사를 해맸지만 꼭 살아서 자식과 가정을 지키겠다는 집념으로 구사일생으로 그 무섭던 폐암도 이겨내 3년 전 서울대 병원에서 완치판정을 받았기에 이젠 죽기 전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하련다.
나는 국가에 바란다 아무 죄 없는 국민을 국가 공권력을 이용하여 민간인 살해 사건 피해자 직계가족이 살아있을 때 명예 회복과 배·보상을 하여줄 것을 요구한다. 내 나이 75세 그동안에 살아온 가시밭길 이 악물고 눈물로 살아온 세월 다시는 이 땅에서 그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아니 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