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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都城)의 배경에 북한산성(山城)이 있다면, 영암읍성(邑城)의 배경은 영암산성(山城)일 것이다. 영암산성하면 우리는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등반코스인, 월출제일관(月出第一關)이 새겨진, 산성대(山城臺)를 어렵지 않게 떠올리게 된다. 월출산의 현재와 과거가 소통하고 있을까? 영암성 축성의 배경이 바로 전국의 산행객들의 발길이 머무는 이곳 산성대였다니, 역사의 숨결이 새삼 놀랍기만 하다. 월출산은 적어도 고려 때부터 우리 영암의 조상들이 왜적과 대항했던 최후의 보루였을 것이다. 험준한 산성대까지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홀로 슬하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산기슭에 숨어있다가 놈들에게 발각되어 변을 당한 최씨 부인의 사연이 못내 가슴을 저민다. 어쩌면 지금도 둘레길 언저리 어디쯤에서 못다 푼 한(恨)을 달래는 제2, 제3의 ‘최씨 부인’들의 곡(哭)이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영암성의 축성(築城)과 수성(守城), 훼철(毁撤)의 역사 한 중심에 왜구(倭寇)에서 일제(日帝)로 대물림되어 온 질긴 악연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저 공맹(孔孟)시대 선진 유학의 전통을 면면히 사수해 온 영암향교의 발자취가 영암성 역사의 씨줄과 날줄로 아로새겨져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영암성의 축성은 영암향교의 건립과 그 궤(軌)를 함께한다. 시대 구분이나 연대 암기가 역사 공부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게 사실이지만, 1398년과 1963년은 영암성, 영암향교를 알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연대임에 틀림없다. 태조 무인년(戊寅年)인 1398년은 향교의 상징인 문묘(文廟), 즉 공자의 사당이 건립되었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1398년이 바로 영암향교의 생일인 셈인데, 이처럼 향교에서 왼편에 문묘를 모시는 방식이 읍성 내 동헌(東軒) 축조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도성(都城) 축조 방식인 ‘좌조우사(左祖右社)’, 즉, 궁궐 좌측에는 종묘를 짓고, 우측에는 사직단을 짓는다‘는 원칙을 영암읍성(邑城) 축조 방식에 적용해 볼 때, 동헌(東軒) 좌측에 종묘(宗廟) 대신 문묘를 모신 것으로 보아 영암성은 향교 건립 시기인 1398년과 거의 일치하거나 적어도 그보다 이전인 고려말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추론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거가 바로 1963년에 편찬된 「영암군지」라고 이 책은 밝히고 있으니, 확인 차원에서라도 「영암군지」를 섭렵해야 하는 또 하나의 과제가 우리 앞에 주어진 셈이다.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끊이지 않았던 왜구들의 침략과 일제 식민지 침탈의 역사는 양달사 의병장이 활약한 을묘왜변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쳐 올해 120주년이 된 1905년 을사늑약의 치욕적인 영암성 훼철 만행에서 절정에 달했다. 성곽은 허물어지고 헐값에 성터를 불하받은 일본인들과 친일 앞잡이들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가 하면, 군수가 매월 삭망례(朔望禮)를 행했던 객사(客舍) 자리에는 어느새 일본 신사(神社)가 세워져 그곳에서 조선의 아이들은 매일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序詞)’를 외쳐대야만 했다. 황국신민의 준말인 국민(國民)학교는 여전히 우리 뇌리에서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현실이 애처롭기만 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이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영암성 복원 사업은 과거의 거울로 현재를 재조명하는 냉철한 역사인식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더욱이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령이 촉발시킨 사이비(似而非)와 맹신(盲信)을 극복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수시처중(隋時處中)의 상식과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온고지신(溫故知新)에 입각한 유학(儒學) 전통의 올바른 계승과 실천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기이다. 그 길에 영암성과 영암향교가 늘 함께하길 기대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