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군과 영암학회의 「영암성 영암사람들」이 출간된 지 달포가 지났어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단순한 ‘홍보 책자’라고 하기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흔히 향토사 연구서나 홍보 책자들에서 풍기는 딱딱하고 분절적인 냄새가 아닌, 역사와 문학이 어우러진 서사(敍事) 구조가 돋보인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다음 페이지를 재촉한다. 거기에 더해 다른 지역 사례까지 곁들인 치밀한 사료 고증과 사진, 삽화 등의 시각 자료까지 버무려져서 독자들에게 공신력과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그래서 이 책은 마치 역사서이면서 소설책 같고,...
낭산로에서 영암군민신문2025. 02.21영암성과 사람들의 역사와 가치를 속속들이 담아낸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책으로 출간됐다. 영암군(군수 우승희)이 20일 영암성 연구 홍보 책자 을 발간했다. 영암학회에 의뢰해 발간된 이 책은, 영암성 축성 배경에서 주요시설 배치 과정, 각 시설 규모와 기능, 성 안팎 발생 주요 사건 등까지 관련 연구 결과가 총망라돼 있다. 이전까지의 영암성 연구는 영암경찰서 뒤편의 성곽 발굴조사를 기초로한 성곽 축성 시기·구조 등에 머물러 있어, 이번 책자 출간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이 지역사회의 대체적 평가다. 특히, 새...
지역사회 이승범 기자2025. 01.232022년 11월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연구원에서는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이란 책을 발간하였다. 제주대첩은 1555년 을묘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의 마지막 전투였는데, 우리 지역 영암과도 연관이 있는 의미 있는 사건이다. 을묘왜변은 왜적 6,500여 명이 왜선 70여 척의 대함대로 지금의 완도인 가리포를 지나 음력 5월 11일(이하 날짜는 음력 기준) 과거 영암 땅이었던 달량성으로 들어오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과거 식량을 약탈하기 위한 소수의 왜구 무리와는 다른 전투병 왜적의 침입이었다. 완도, 진도, 강진, 장흥 등을 휩쓸며 물...
특별기고 영암군민신문2025. 01.09을묘왜변은 임진왜란 37년 전인 1555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남해안 지역과 제주도까지 큰 패해를 입었던 사건으로,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가리포(현 완도)를 거쳐 음력 5월 11일(이하 음력) 왜선 10여 척이 당시 영암군 땅이었던 이진포, 달량성에 침입하여 성 아래 민가를 약탈하고 성을 포위하면서 영암성대첩의 서막은 시작되었다. 가리포 첨사 이세린(李世麟)이 왜선을 관측하여 전라병사 원적(元績)에게 보고하면서 원적은 바로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 장흥부사 한온(韓蘊)과 함께 당시 영암군에 속...
칼럼 영암군민신문2024. 07.11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평소에 보지 못하는 뭔가를 찾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정한 곳에서 보았던 시각적인 특별한 장면들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다. 경주 감은사 탑, 낙산 밤바다의 비단결 같은 파도, 지리산 천왕봉 일출, 속리산 자락 우렁우렁 피어오르던 잎사귀들,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펼쳐진 전망, 봄이 되면 은빛의 강물이 더 반짝이는 섬진강 등등이 있고, 우리 고장 영암에도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 지금은 등산로 ‘하늘 아래 첫 부처길’이 정비되어 더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국보 제144호 ‘마애여래...
칼럼 영암군민신문2024. 05.16영암성대첩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4월 4일 영암읍 소재 한 음식점에서 개최됐다. 영암성대첩은 1555년(을묘년, 조선 중종 10년)에 왜적 6천여명이 영암성으로 쳐들어오자 영암군민과 양달사 의병장이 중심이 되어 영암성을 굳건히 지키고 왜적을 패퇴시켰던 대첩으로, 영암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다. 역사의 기록에는 을묘왜변의 한 사건으로 영암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 것은 기록하고 있지만, 관이 아닌 의병이 중심이 되어 왜적을 무찌른 대첩이라 역사서에는 소홀히 다뤄졌다. 영암성대첩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이제라도 영암사람들이 ...
영암in 이승범 기자2023. 04.14'둥둥둥' 북을 울리자 범바우산(영암읍 청송 2차 아파트 뒤쪽 야산)에서 밀고 내려온 의병들은 향교(현 영암읍 청송2차 아파트 일대)에 틀어박혀 영암성에 갇힌 영암 백성들을 위협하고 있던 왜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5월 11일(이하 음력) 당시 영암군에 속해 있었던 달량성(현 해남군 남창리)으로 왜적 6,000여명이 처 들어와 파죽지세를 올리며 5월 24일 영암성까지 처 들어온 그들의 기세를 꺾고 영암 역사상 최대의 승전을 올린 '영암성 대첩'의 시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68년 전인 조선 명종...
오피니언 영암군민신문2023. 02.17영암경찰서는 '영암읍 남문로 19번지'에 위치한다. 경찰서 정문과 같은 방향 안쪽에 위치한 본관은 군서 쪽을 향하고 있다. 서쪽으로 더 치우친 서남향을 향하고 있으니 오후에는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곳이지만, 오전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 창문 너머 지근거리에 있는 영암의 상징 '월출산'이란 큰 그림을 한 폭 담아서 그 기(氣)를 온전히 누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새로 들어선 아파트와 군서방향으로 늘어선 산자락들만 겨우 들어온다. 본관은 1986년에 준공된 건물이다. 40여년이 다 되어가는 건...
오피니언 영암군민신문2022. 11.04월출산 '영암산성'의 흔적이 氣 체육공원 등산로 산성대 주변 일대에 산재해 있다 한다. 氣 체육공원에서 난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중간쯤에 위치한 '산성대'는 산성 돈대, 산성의 전망대, 산성의 망루 등을 뜻한다. 바로 이곳 주위를 조사한 양달사현창사업회 이영현 사무국장 일행들이 산성대 주변에 기와 파편들이 흩어져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또 이를 토대로 아예 작정하고 영암산성 조사에 나선 결과, 겉 쌓기 된 약 10m 가량의 성벽을 확인할 수 있었고, 주능선 중앙 암벽에는 개거식 성문이 있었음직한 구멍, 화살대로 이용한 시누대와 활을 만드는 재료인 벚나무와 때죽나무 주위로 수많은 기와 파편들까지 산재되어 있음을 보았다. 이를 토대로 이영현 사무국장은 <영암군민신문> 고정칼럼(낭산로에서)에 투고한 기고문을 통해 전문적은 조사가 반드시 필...
오피니언 영암군민신문2022. 06.10-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양달사현창사업회부터 소개해달라. ▲ 양달사현창사업회는 1555년 5월 25일 영암성 대첩에서 영암군민과 함께 6천여 왜구를 물리친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 장군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고 영암군민의 자긍심을 고양시키기 위한 비영리 민간단체입니다. 회장은 장만채 전 전남도교육감이 맡고 있고. 정회원이 전국적으로 230명 정도 됩니다. 2019년 9월 25일 창립총회에서 매년 5월 25일 영암성 대첩일에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으나, 코로나19 관계로 올해까지는 이사회로 갈음하기로 했...
기획특집 이춘성 기자2022. 05.131929년 5월 22일 10시. 영암군청 이전 신축 준공식이 있었다. 그해 5월 30일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동헌이 있었던 현 영암성당 자리에서 본래 객사가 있었던 자리로 군청을 이전 신축한 것이었다. 이날 기념사에서 전 도경시(道警視, 경찰총경) 구자경 군수는 일조동조론(日朝同祖論)에 따른 내선(內鮮) 융화와 자치능력 향상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했고, 임시정부에서 현상금까지 내걸었던 김서규 전라남도지사는 조선인의 사명과 의무에 대해 일장 훈시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현 영암중학교 앞에 소나무를 심은 영암의 해결사...
오피니언 영암군민신문2021. 11.26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교수는 ‘을묘왜변과 영암’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1555년(명종 10) 발발한 을묘왜변 당시 영암에서의 승보는 왜적을 물리치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그때 경험한 민관합동의 국란극복의 노하우와 그때 입었던 상처의 치유과정은 나중에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적지 않은 자산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의 영암은 한반도의 남해와 서해를 끼고 있어 왜적을 막는 요지로 해양 방어의 요충지였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에 의하면 을묘왜변이 발발해 달량성을 점령한 왜적은 계속해...
지역사회 영암군민신문2019. 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