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목 위에 새긴 시대의 목소리, 김준권 화백의 삶과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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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판목 위에 새긴 시대의 목소리, 김준권 화백의 삶과 귀향


한국 현대 판화 예술을 대표하는 김준권 화백이 50여년 만에 고향 영암으로 돌아왔다.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최전선에서 판화와 걸개그림으로 시대의 목소리를 새겨온 그는, 귀향을 계기로 월출산을 마주하며 새로운 창작의 길을 걷고 있다. 이번 기획특집에서는 김 화백의 삶과 예술 세계, 그리고 고향에서 다시 시작하는 예술 여정을 조명한다. <편집자 註>


■ 영암에서 시작된 그림의 길
 
김준권 화백은 영암 역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까지 고향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마을 풍경을 관찰하며 혼자 그림을 그리며 노는 것을 즐겼다. 그는 “또래들이 뛰어놀 때 나는 나무 껍질이나 돌멩이에 선을 긋고, 손에 잡히는 종이에 그림을 끄적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림은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몸에 밴 놀이였고, 훗날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게 한 출발점이었다.
어린시절 상경한 그는 오산고등학교 미술반 활동 당시 선배 작가인 이중섭 화가에 영감을 받아 화가의 꿈을 키웠고, 홍익대학교에 진학해 서양화와 유화를 전공하면서 본격적인 예술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예술의 길에 접어든 70~80년대는 유신체제가 강화되고 긴급조치가 발동되던 암울한 시기였다. 자유로운 전시와 창작은 국가 권력의 검열 아래 철저히 통제됐다.
김 화백은 예술은 단순히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어야 한다는 자각을 일찍 얻었다.
 
김준권 화백 作 <나는밥이다목판>

■ 모더니즘과 현실의 괴리, 민중미술로의 전환
 
1970년대 미술 교육은 서구 모더니즘과 형식주의가 주류였다. 그러나 사회 현실과 유리된 추상 실험은 그에게 공허하게 다가왔다. 그는 한때 하이퍼리얼리즘 기법으로 사회적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지만, 점차 시선은 민중의 삶과 역사적 사건으로 옮겨갔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그의 예술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억압과 폭력에 맞서 싸운 시민들의 얼굴은 그의 작품 속에 흐릿하지만 강렬한 형상으로 남았다. 그는 “당시의 예술은 미학적 실험이 아니라 현실을 증언하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목판화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판화는 대량 복제가 가능해 대중과 쉽게 공유할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검열의 감시망에서도 자유로웠다. 그는 1984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판화 작업에 몰두하며, 억압받던 시대를 기록하고 메시지를 전했다.
 
■ 교단에서의 투쟁과 교육 민주화
 
예술가로서의 길과 더불어 그는 교사로서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삶을 택했다.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던 시절, 그는 또 다른 현장을 경험했다. 예술이 거리에서 사회 변화를 노래했다면, 교직은 일상 속에서 희망을 나누는 또 하나의 투쟁이었다.
1989년 전교조 결성은 그의 삶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교육 민주화 운동의 한복판에서 교사로서의 소명을 깊이 고민했다. “학생들에게 진실을 가르치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예술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교직 생활을 관통했다.
 
■ 거리로 나선 미술, 판화와 걸개그림
 
1980년대 한국 사회는 민주화 열망으로 뜨거웠다. 예술가들도 거리로 나섰다. 김 화백은 서울미술공동체 활동을 거쳐 민중미술협회 창립에 함께했다.
1981년 서울에서 열린 ‘을축년 미술대동잔치’는 그가 기억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제도권 화랑을 벗어나 작가들이 직접 기획한 이 전시는 관객과 작가가 소통하고 작품이 판매되는 자생적 아트마켓이었다. 이는 당시 미술계 권위에 맞선 파격적인 실험장이었다.
특히 판화와 걸개그림은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예술 언어였다. 판화는 값비싼 화랑이 아니라 거리와 광장에서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
민주화 집회 현장에서 걸개그림은 민중의 깃발처럼 펼쳐졌다. 그는 “미술이 민중의 무기이자 깃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했다.
국회 환담장에 전시된 김준권 화백 作 <이산 저산>

■ 한국적 조형 언어와 세계로의 확장

김 화백의 작업은 단순히 정치적 선동에 머물지 않았다. 민화, 풍물, 대동사상 등 한국 전통에서 새로운 조형 언어를 찾았다.
그는 “민중의 삶 속에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고, 그것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예술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1990년대 들어 그는 해외 전시와 교류에도 적극 참여했다. 교황 방한 행사 무대 장식에 참여하고, 일본.유럽 전시에서 한국 민중미술의 메시지를 전하며 시야를 넓혔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판문점 평화의 집 회담장에 걸린 대표작 <산운-0901>은 목판화의 현대적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 작품이었다. 46장의 판을 겹쳐 6개월 동안 완성한 이 작품은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의 현장을 장식하며 역사적 의미를 더했다.
 김 화백의 목판화는 단순한 미술작품이 아니라 시대의 기록이었다. 군사독재, 민주화 항쟁, 분단 현실, 그리고 일상의 삶까지. 그는 판목 위에 사회적 기억을 새기며, “예술은 언제나 시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지켜왔다.
 그는 이를 “큰 역사가 아니라 작은 개인사의 눈으로 본 사회”라고 설명했다. 거대한 역사 서사를 미시사적 시각으로 풀어내며, 구체적 인간의 삶 속에서 역사가 드러나는 방식을 보여주고자 했다.
 
김준권 화백 作 <달뜨는 월출산>

■ 고향으로의 귀향, 월출산을 품다
 
2024년, 그는 50여 년 만에 고향 영암으로 돌아왔다. 귀향을 두고 그는 “영암에서 사춘기를 겪고 있다”고 표현했다. 오랜 세월 떠나 있던 고향과 다시 마주하며, 어린 시절 바라보던 월출산은 여전히 그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했다.
그는 월출산이 보이는 작업실을 마련해 고향 풍경을 담은 작품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귀향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지역사회에도 의미를 남겼다.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은 그의 작품 9점을 기증받았다. 월출산, 사자봉, 바람재, 큰바위얼굴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에는 고향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담겼다.
또한 그는 지역 초등학생들과 함께 ‘판화 버스킹’을 진행했다. 수묵.채묵 기법을 활용한 전통 목판화 제작, 합동 작품 <판화놀이>, 바닥 그림 <우리들 세상> 등을 지도하며, 아이들에게 창작의 즐거움과 예술적 깊이를 전했다.
영암 귀한후 월출산 조망권에 자리 잡은 김준권 화백

■ 판화의 미래를 새겨나가는 김 화백

현재 김 화백은 한국목판문화원 원장으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는 “목판화가 낡은 예술이라고만 보지 말고, 창작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라”고 강조한다.
또 “한국 목판 문화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지 보여주는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김준권 화백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군사독재와 민주화 운동, 교육 민주화, 민중미술, 그리고 고향 귀향까지. 그는 판목과 걸개그림, 교단과 광장을 넘나들며 시대를 기록했다.
그의 예술은 단순한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 사회적 증언이자 공동체의 기억이다. 영암에서 다시 시작된 그의 예술 여정은 고향과 시대를 잇는 다리이자, 미래 세대에게 전해줄 소중한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키워드 : 김준권 화백 | 세계로의확장 | 현대판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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