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막걸리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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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막걸리 한잔

정찬열

비가 내린다. 이 저녁, 맘 맞은 친구를 불러내어 막걸리 한 잔 했으면 딱 좋겠다. 누구를 부르면 좋을까 생각하는데 한국에 있는 김 회장 얼굴이 떠오른다.
3년 전, 한국에 나가 걸어서 국토종단 할 때의 일이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한 달을 걸었다. 크지 않는 나라지만 각 지방마다 사람들의 말씨도 살아가는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사람은 제 부모를 닮아 태어나지만, 살고 있는 산천을 닮아가기 마련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전라도에서 충청도, 경상도를 거쳐 강원도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해남 바닷가 어민들한테 새참을 얻어먹기도 하고, 강진 종묘작업장 아주머니는 찰떡 한 덩어리를 배낭에 넣어주기도 했다. 전북 무주를 지날 때는 경찰간부가 집을 통째로 내주어 하루저녁을 편히 묵었고, 평창에서는 심마니 집에 들러 차 한 잔을 대접 받았다.
강원도 양양읍을 향해 걷던 날이었다. 군서면 수리마을 상점에서 산불방지 행정 보조원으로 활동하는 분을 만났다. 미국에 사는 사람인데 국토종단 중이라고 소개를 했더니, 명함 한 장을 건네준다. ‘한남초등학교 총동문회 회장 김형기’라고 적혀있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초등학교동창회장’ 명함이다. 초등학교 동창회장 명함을 저렇게 당당하게 건네주다니!
따지고 보니 나하고 동갑이다. 한참 얘기를 하다가, 밥 때가 되었는데 우리 집에 가서 점심이나 들고 가시라며 소매를 끌고 간다. 난데없는 객이 나타났는데도 그의 아내가 싫은 내색 없이 반겨준다. 그 남편에 그 아내다. 작은 술상 하나를 차려주고 나서 딸막딸막 식사준비를 시작한다. 김 회장이 막걸리를 잔이 찰찰 넘치게 따라준다. 목마른 김에 단숨에 들이켰다. 꿀맛이다. 술 마시는 내 모습을 보며 그가 빙긋이 웃는다.
술잔을 나누며 자분자분 풀어내는 그의 얘기가 가슴을 울린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어느 날, 저녁밥을 먹다가 부엌에 나가보았더니 어머니가 솥 밑바닥을 훑은 맹물을 마시고 계시더란다. 그 길로 집을 나갔다. 아무도 모르는 먼 곳으로 가서 머슴살이 5년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논 천오백 평을 사 드렸더니, 어머니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하더라고 했다. 머슴 사느라 힘은 들었지만 그로 인해 온 집안이 다 편하게 되더라고 그때의 일을 회상한다.
가슴이 찡했다. ‘꼬마둥이 머슴’이 얼마나 힘든 노릇인지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안다. 어머니가 굶지 않도록, 어린 나이에 5년 동안이나 힘든 일을 해냈다는, 김 회장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교과서에 실어 아이들이 본받도록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갔다.
젊어 한 때 음악에 빠졌다고 했다. ‘풍악에 환장을 해서’ 세월 가는 줄 몰랐던, 그 시절에 아내를 만났고, “집 사람이 날 따라 사느라 고생께나 했다”고 너털웃음을 웃는다.
그의 아내가 차려내온 따뜻한 점심을 배불리 먹었다. 헤어지면 그만일 수도 있는 사람을 정성껏 대접하는 부부를 보면서 나는 언제 낯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친절을 베푼 적이 있었는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국토종단 중 만났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가슴에 모닥불을 피워 준 사람들. 아름다운 산천을 닮아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따뜻했을까.
빗발이 점점 굵어진다. 잔이 찰찰 넘치게 막걸리를 따라주던 김 회장이 생각난다. 나는 누구로부터 막걸리 한 잔 함께 하자고 초대받을 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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