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현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영암학회 회장 소설가 |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을 지배하게 된 일제는 조선의 통치 체제를 해체하고 식민 통치에 필요한 기반구축을 위해 종전 12부 317개 군을 1부 121군으로 축소시키고, 4,322개 면은 2,522개 면으로 재편했다. 그리고 1909년 5월 30일 총독부에서 각 도에 보낸 '폐합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를 보면 폐합을 원하는 면에서는 기존 면의 연혁과 새로운 면의 명칭 유래, 각 면의 마을 수, 면적 및 거리, 주민 의견 등을 자세히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당시 영암군 각 면에서 전라남도를 통해 총독부에 보고한 '영암군 폐합에 관한 조서(대전행정기록관 관리번호 JA0002551, 511~513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먼저 군시면, 군종면을 통합한 새로운 면은 '영암군 중추에 해당하므로 영암면'으로, 비음면과 북이종면도 통합하여 '지리적 역사적인 근거는 없으나 군의 북방에 위치하고 새로 면을 설치한다는 의의를 살려 신북면'으로, 서시면과 서종면은 '지난날 영암군의 서면이었으므로 구 명칭을 근거로 군서면'으로, 금마면과 원정면은 '각 면에서 한자씩을 취하여 금정면'으로, 북이시면과 종남면, 명산면은 '북이시면과 종남면에서 한 자씩 취한 후 유시유종의 의미를 살려 시종면'으로 변경해 줄 것을 요구했고, 그대로 인가되었다. 영암군 17개 면이 오늘날처럼 11개 면이 된 것이고 당시 인구는 64,108명(13,035호)이었다.
이후에도 일제는 식민 지배 강화를 위해 1920년 7월과 1931년 4월 1일에 읍면을 대폭 손질하는데, 1931년 1월 27일 우마노세이치(馬野精一) 전남지사가 사이토마코토(齋藤實) 총독에게 보고한 '면의 명칭 변경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를 보면, 이들 면의 명칭 변경 신청 사유는 '북일시, 북일종, 곤일시, 곤일종, 곤이시, 곤이종의 면명이 혼동하기 쉽고 불편하므로 차제에 개정하고자 한다'고 하였고, 새롭게 부르고 싶은 면의 명칭과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먼저 북일시면은 '옛날 면내에 덕진이라는 덕이 높은 여인(일본어로 女尼로 적혀 있다)이 있었고 그 여인이 살았던 마을을 덕진이라고 불렀고 그 마을이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덕진면'으로, 북일종면은 '이 지역의 해안에 있는 포구인 도포리가 영산포와 함께 널리 알려져 있어서 도포면'으로, 곤이종면은 '면 앞바다를 예부터 서호강이라고 불렀고 일반적으로 그 명칭으로 지역을 통칭하고 있기 때문에 서호면'으로, 곤이시면은 '면의 중앙에 학산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산이 있기 때문에 학산면'으로, 곤일시면은 '곤미현의 소재지로서 그 유적이 있고 그 이름이 유명하기 때문에 그 연혁을 전하는 의미로 미암면'으로, 곤이종면은 '3면이 바다에 접하고 호(湖)라는 이름의 산호리, 동호리, 서호리가 있으므로 삼호면'으로 해달라고 했다. 총독부에서 전라남도의 건의대로 인가한 문서가 1931년 3월 6일 발송되었고, 4월 1일 전국에 공포되면서 11개 읍면의 명칭 변경이 현재처럼 되었다. 모든 문서가 일본어(현 일본어와 다른 고문체)로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읍면 명칭 유래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산면은 학계리와 용산리를 합한 명칭이 전혀 아니고, 삼호면은 영산호 금호호 영암호가 설치될 것을 예견해서 만든 이름이 아니다.
지명연구자들에 의하면, 지명처럼 그 역사나 유래가 깊고 보수적인 것은 없다고들 한다. 또 지명을 새로 연구할 때는 그곳의 자연환경과 역사, 주민의 생활상, 인물사는 물론 그 지역 고대어의 흔적이 남은 방언, 향찰과 이두, 풍수지리, 심지어 사서삼경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금년에 영암군에서 지명조사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쪼록 이번 조사를 통해 영암군 읍면 지명 유래부터 제대로 정리되기를 바란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