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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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연가

김기천 학산면 거주 농민 전 영암군의회 의원
5월 25일 처음 시작한 모내기가 6월 11일에 모두 끝났다. 감사하게도 아무 사고 없이, 트렉터와 이앙기 모두 잔고장 하나 없이 마쳤다. 긴 겨울 가뭄 끝에 흡족하게 내린 봄비로 물걱정 없는 오뉴월을 맞은 것도 큰 행운이었다. 바야흐로 숲을 장식한 녹음이 온 들판까지 번져나가고 때마침 단비도 내린다.
나는 올해 모두 8가지의 모를 길렀다. 한살림 생협과 계약한 백옥찰과 진상 삼광, 농협 수매품종인 영호진미와 새청무 해품, 가족들 식량으로 쓸 골든퀸, 그리고 농촌진흥청에서 1등 밥쌀로 꼽은 안평벼까지. 종자소독과 육묘, 모내기까지 혹시 품종이 섞일까봐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었다. 표찰을 붙이고 칠판에 기록하고 영농일지에 한 번 더 쓰는 복잡함을 감수했다. 8가지 중 해품과 영호진미만 농협 육묘장에 맡겼고 나머지는 직접 길렀다.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고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 쌀을 찾아주는 소비자에게 책임지고 좋은 쌀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올해 처음으로 임차한 농지를 제외하고 모든 필지는 유기인증을 받아 친환경 농사를 짓는 것도 같은 까닭이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생협 소비자에게 호평받은 삼광벼가 충남도의 공공비축미 수매품종이었다. 다수확 품종에 여전히 미련이 많은 우리 현실에 비추어보자니 고개가 숙여졌다.
모내기를 마치면 논둑을 베고 물꼬를 단속하고 잡초의 출몰을 감시하느라 하루가 짧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한 해의 반이 흘렀지만 농부가 농부답게 반 년을 산 것 같아서 스스로 대견해지는 요즘이다.
벼농사는 기계가 다 해준다고들 하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이웃'없이는 어림없는 일이다. 5월 초 저온현상으로 육묘에 실패한 사례가 적잖았는데 자기 일처럼 모 나눔을 해준 이웃들이 있었다. 논이웃끼리 물꼬를 대신 봐주거나 이웃 논둑 풀을 한뼘이라도 더 베어주려는 배려가 어김없었다. 길가다가 모쟁이를 자처한 동네 형님을 만난 일은 더없는 행복이었다. 들판에 둘러앉아 오가는 사람 다 불러대서 못밥을 나누는 그 흔하던 풍경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벼농사를 대하는 농부들의 마음은 훈기로 가득찼다.
모내기를 해본 사람만이 아는 놀라운 비밀은 따로 있다. 펄투성이 논바닥으로 옮겨지는 어리고 연한 모에 자연의 선물이 켜켜이 내려앉는 일이다. 1모작 로터리를 칠 때쯤에는 산자락을 취하게 한 아카시, 찔레꽃 향이 논바닥에 스며들었다. 뒤를 이어 인동꽃향이 찾아들었고 금계국 샛노란 꽃물도 배어드는 것이었다. 논둑 건너에선 솜털같은 삐비꽃이 하염없이 하늘거렸다. 6월에 접어들자 멀구슬나무 보랏빛 향기가 논둑을 타고 넘더니 중순쯤부터는 한낮 땡볕과 함께 비릿한 밤꽃향이 모 포기 사이로 물결쳐댔다. 이른 새벽의 찬이슬과 해질녘의 솔바람은 단골손님처럼 찾아왔고 투구새우와 우렁이, 미꾸라지는 잰 걸음으로 바닥을 헤집으며 잡초의 기세를 억눌러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농부의 땀냄새와 한숨소리, 발자국소리까지 보태지는 것이니 쌀 한 톨에 가히 우주가 담긴 것이 아니겠는가? 누군가는 그랬다. 밥을 지으면 뜨끈한 김 사이로 꽃향기가 난다고,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면 세상을 얻는 기분이라고.
이제 한 해 농사의 반을 마쳤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러 써레시침도 하겠고 유둣날 동네잔치로 서로 위로를 나눌 것이다. 논길을 오가며 누구네 벼가 잘 자라고 병해를 잘 견뎌내는지 눈여겨볼 것이고, 어느 논에 피가 성한다거나 드렁이 구멍으로 물이 다 샌다거나 하는 수군거림으로 한여름을 보낼 것이다.
농사꾼들 사이에는 '주머니에 담아봐야 제 것이다'는 금언이 있다. 봄부터 나돈 긴 장마와 태풍 예보에 농부들 마음이 편치 않다. 급격하게 오른 농자재와 작업비에 시름이 깊어진다. 형편없이 주저앉은 봄철 나락값에 좌절을 맛본 터라 벌써부터 수확기 벼값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자조 섞인 푸념도 꼬리를 문다. 과연 주머니에 얼마나 제 것을 담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오늘은 참 좋다. 반만년 이어온 이 위대하고 경이로운 모내기를, 이토록 멋진 살림살이를 마침내 마쳤으니 말이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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