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미술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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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빨간 미술시간

민일기 영암군 부군수
학창시절 미술 시간은 빨강으로 남아 있다. 해마다 몇 시간씩 두꺼운 8절 도화지를 뻘겋게 칠했다. 원통형 용기에 담겨 쉽게 굳고 갈라지던 포스터칼라 물감도 빨간색이 먼저 닳았다. 도화지 속 그림에는 굵은 고딕체로 글씨도 써넣어야 했다.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등이 한 축이었다. 다른 축은 ‘무찌르자 공산당’ ‘잊지 말자 6·25’ 등이 차지했다. 시간이 흐르며 예방 차원의 불조심은 더 폭넓은 자연보호 포스터로 이어졌다. 대결을 강조했던 반공은 남북 화해 무드를 타고 평화와 공존의 표어에 자리를 내줬다.

요즘 학교에서는 둘 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풍경인가 보다. 그 시절 미술시간이 아직도 또렷한 걸 보니, 강렬한 색과 함께 일종의 콤플렉스가 내 무의식에 심어졌나 보다. 좋은 상처는 삶에 약이 되는 법이다. 덕분에 꺼진 불도 다시 보고, 자나 깨나 불을 살피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해마다 산불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기후위기는 지구환경의 불안정성을 더했고, 산불의 빈도와 강도를 높이는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과거 봄철에 80%가량 집중되던 산불은, 고온·건조·강풍의 이상기후와 결합하며 불특정 기간, 산발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최근 10년 동안 산불조심 기간 이외에 발생한 연평균 전국 산불은 153건에 달한다.

같은 기간 전남에서 산불은 해마다 43건 정도 발생했다. 문제는 원인이다. 논·밭두렁 소각이 37%, 입산자 실화가 31%를 차지해 전체의 70%에 육박한다. 기후위기를 탓할 것도 없이, 사람의 부주의가 29건이 넘는 산불을 냈다는 말이다.

산불 내부는 섭씨 1,200℃여서 금속도 물처럼 녹인다. 산과 같은 경사진 산비탈에서 불은 더 빨리 옮겨붙고, 초속 3m의 바람을 타면 85배의 속도로 확산한다. 한 시간이면 여의도 30배 면적을 불태울 수도 있단다.

진화된 다음에도 나뭇잎과 미생물, 흙이 뒤엉킨 부엽토층에 불씨가 남아 있으면 뒷불로 큰 피해를 초래한다. 산불 난 자리를 복구하려면 반백 년 넘는 세월이 필요하다. 누구나 쉽게 낼 수는 있지만, 한 번 발생하면 빠른 시간 내에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다. 작게는 지역이, 크게는 국가 전체가 동원돼도 진화가 쉽지 않은 대형사고가 산불이다.

△논·밭두렁 태우기 및 쓰레기 소각 금지 △등산 시 화기물질 소지 및 흡연 금지 △미허가 야영·취사금지 등 산불 예방 수칙 준수는 더이상 권고 사항일 수 없다.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사회적 책무다. 그 누구에게도 공공의 재산이자 미래세대에 물려줄 환경을 훼손할 권리가 없어서다.

영암군도 산불 예방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주민참여 캠페인을 열고, 11개 읍·면과 등산로 입구에 현수막을 걸었다. 산불 발생 위험 시간대에는 마을 안내방송도 틀고 있다. 82개 마을에서 ‘소각 산불 없는 녹색마을 만들기 캠페인’ 서약도 받았다.

언론에서 본 산불 실화자들은 편견이 있었다. 불은 과소평가하되 이를 제어하는 자기 능력은 과대평가한다는 점이다. 그리스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전했다. 불은 본디 신의 것이어서 이를 이용하는 인간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지나침이 없다는 경고로도 신화는 읽혀야 한다.

어릴 적 미술시간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제아무리 강렬했던 빨간 불꽃도 도화지의 범위를 벗어난 법이 없었다. 포스터 속처럼 불은 완전하게 관리·통제돼야 안전하다. 산과 들, 숲에는 불을 제어할 도화지 같은 장치가 없다. 자기 과신이 넘치는 곳에서 인간은 항상 더 심각한 재앙을 초래해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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