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義兵은 한말 의병전쟁의 '기폭제'이자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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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義兵은 한말 의병전쟁의 '기폭제'이자 '大尾

영암문화원, 최초의 본격적 연구서 <영암의병사연구> 발간 세미나

호남의소 영암서 결성 국사봉은 의병사령부 입증…추가 연구 기대

을묘왜변과 임진왜란 때 '영암 의병'은 한말 의병전쟁의 기폭제 역할과 함께 그 대미를 장식했으며, 국사봉은 남도의병의 지휘본부였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영암문화원(원장 김한남)은 지난 8월 29일 군청 왕인실에서 이 같은 '영암 의병'의 활동을 분석한 사상 첫 연구서인 <영암의병사연구> 발간에 따른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영암의병사연구> 공동저자인 박해현 초당대 교수와 조복전 영암역사연구회장은 "1907년부터 1909년 말까지 2년 넘게 계속된 의병전쟁에 수천명이 넘는 영암주민들이 참여했으며, 1천명 가까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인원의 30%가 희생되는 엄청난 혈전이 계속되었고 영암 전체가 의병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영암은 의병의 성지(聖地)로 불러야 한다"면서, "영암 의병 전통은 구림 3·1운동, 영암농민항일운동으로 계승·발전되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날 발간된 <영암의병사연구>는 '영암 의병'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로, 일본 정규군과 전쟁을 수행한 '호남창의소'와 '호남의소'가 영암지역에서 결성되었고, 금정 국사봉은 의병사령부임을 입증하는 학문적 성과를 거둬, 향후 영암 의병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밝혀내는 출발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영암중 합창단의 '독도는 우리땅' 합창과 영암 관내 12개 중학교 연합합창단의 '신독립군가' 합창 등 식전행사에 이어 열린 이날 세미나에는 전동평 군수와 조정기 의장, 일본의 나가노스 미치로 전 의원, 군민 등 250여명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세미나에서는 박해현 교수가 '한말 영암 의병', 조복전 회장이 '임진왜란 영암 의병' 등의 주제발표를 했으며, 오수열 조선대 명예교수와 이종범 한국학호남진흥원장이 토론에 나섰고, 질의답변도 이어졌다.
종합토론에서 오수열 교수는 <영암의병사연구>에 대해 "영암 의병 연구에 금자탑을 쌓는 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오 교수는 "당시 왜군의 주침략로가 부산에서 도성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호남은 그 일차적 피해지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활동은 호남에서 가장 활발했는데 이는 바로 호남민의 '의로운 정신'에서 비롯된다"면서 "영암에서의 의병활동 또한 이러한 충의정신의 발현이었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이어 "연구물의 체제를 더욱 논리적으로 다듬어야 하고,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서술되고 있는 영암 의병활동에 대한 심층적 분석·연구, 효과적 사실관계 확인을 위한 주석 부기, 감상 보다는 사실에 충실한 연구 등의 문제점을 더욱 보완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종범 원장은 '영암의 선비문화'에 대한 강의에 나서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오한(五恨) 박성건(朴成乾), 산당(山堂) 최충성(崔忠成), 신희남,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신북 모산리 유씨가의 영팔정(詠八亭) 등을 소개했다.
전동평 군수는 이날 행사 축사를 통해 "영암은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 장군과 구한말 의병활동의 사령부인 국사봉에서 활동한 의병 등 수많은 의병들이 구국운동을 일으켰던 곳으로, 최근 사료 발굴의 어려움을 비롯해 세월의 흐름 속에 혼백마저 소멸되어 가고 있어 안타까운 실정이지만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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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의병사연구> 어떤 내용 담고 있나?
'영암 의병'이 '호남 의병'의 구심점 역할 규명
일본군 14연대 진중일지 첫 활용 전투상황 복원
<영암의병사연구>는 모두 다섯 장으로 나눠 제1장 義鄕, 영암, 제2장 임진왜란과 '영암 의병', 제3장 한말 의병 전쟁과 호남 의병, 제4장 호남 의병의 선봉, '영암 의병', 제5장 영암 의병의 역사적 의의 등을 기술하고 있다. 부록에는 민족사를 빛낸 '영암 의병' 활동상을 묶고 있다.
연구의 본론이기도 한 '임진 의병' 편은 조복전 회장이, '한말 의병' 편은 박해현 교수가 맡아 서술했다.
두 저자는 책 머리말에서 "백척간두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온 몸을 던졌던 '영암 의병'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영암의병사'를 정리하는 이유였다"면서, 이 책은 "영암 의병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로 일본 정규군과 전쟁을 수행한 '호남창의소', '호남의소'가 영암지역에서 결성되고, 금정 국사봉이 의병사령부임을 입증했으며, 의병 전쟁의 '시작·절정·大尾'에 '영암 의병'이 있음을 밝혀냄으로써, '영암 의병'이 '호남 의병'의 구심점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설명했다.
저자들은 특히 "그동안 연구자들이 이용하지 않은 당시 일본군 14연대가 작성한 '진중일지'를 활용, 당시 의병들의 전투상황을 구체적으로 복원한 점은, 본서의 가치를 높여준다"고 자평하면서, 다만 "영암 의병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밝혀내는 작업은 미완의 과제로 남겨놓았다"고 한계점을 밝히기도 했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영암 의병'에 대해 조선시대 최초의 의병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의병임을 확인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도포 출신 양달사가 조선 시대 '최초 의병장' 역사를 썼고, 임진왜란 때 수많은 영암 출신들이 국난극복에 몸을 던졌는데, 전몽성·몽진 형제가 대표적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 영암을 찾은 이순신을 따라나선 영암인들이 많았고, 이순신은 영암인들의 활약에 감동했다. 이순신이 연주현씨 집안 사이에 오간 서간에서 '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도 영암 의병의 공을 높이 평가한 것"이라고 저자들은 설명했다.
저자들은 또 호남의소의 특징에서 보듯 '독립 의진'을 중심으로 '연합 의진'을 구성한 '호남 의병'의 뿌리는 '영암 의병'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하고,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일어났던 '안민 의병'의 특징도 갖는다고 규명했다.
이어 저자들은 "영암 의병은 최후의 1인까지 일본군과 전투를 하다 죽음을 선택한 '옥쇄(玉碎)'를 각오한 의병이었다"면서, "영암 의병이 한 사람도 남음 없이 쓰러졌을 때, '호남 의병'의 장엄한 독립전쟁도 종언을 고하였듯이 영암 의병의 처절한 항쟁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의 야욕을 저지시켰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사실을 토대로 저자들은 "영암이 없으면 '호남 의병'이 없다. 한말 호남 의병의 중심에 영암 의병이 있다. 의병 전쟁이 독립전쟁으로 본격화될 때 영암 의병들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박평남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호남창의소'가 그것이다. 파견된 일본군 기병중대가 진압은커녕 공격을 받는 등 난공불락이었다. '전남 제일 의병장' 심남일 의병이 가담한 '호남의소'는 전남 중·남부 지역을 장악한 대규모 의병부대였다. 영암 의병이 '호남의소'의 핵심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고, "금정의 국사봉은 이 '호남의소' 사령부로, 이곳을 근거로 남평, 능주, 보성, 장흥, 강진, 해남을 아우르는 의병 전쟁이 이어졌으며, 일본군의 줄기찬 공격을 받아도 국사봉 의병사령부는 공략되지 않은 요새였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은 "영암지역민들은 의병 전쟁 때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가 있었음에도 이후 독립운동에도 가장 앞섰는데, 이는 올곧음을 지향한 '의향, 영암'의 전통이 뿌리내려져 있음을 말해준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영암 의병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각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가승(家乘)·문집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서, "국사봉에는 농소·용천·사촌·이암 등 빛나는 영암 의병들의 전승지와 '고인동', '진터골', '칠성동' 등 '영암 의병'들의 활동상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 많고 영웅담도 함께 전하고 있어 구체적인 연구와 유적지 정화작업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편 <영암의병사연구>에 의하면 한말 영암 출신 의병은 187명에 이르며,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한 의병장도 17명 남짓으로 파악됐다. 이들은 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해 활동했으며, 한 지역에서 이처럼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고을은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최초의 여성의병장'으로 추앙받는 양방매는 영암 금정 출신으로 확인됐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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