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영암군 문화유산 제1호, 영암성
검색 입력폼
 
오피니언

사라진 영암군 문화유산 제1호, 영암성

이영현 소설가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영암성(靈巖城). 내가 늘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영암의 문화유산 제1호다. 우리 영암군민이 100여 년 동안 피땀을 흘리면서 쌓은 최고의 금자탑이다. 하지만 지금 그 문화유산은 우리에게 없다. 사금파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저 소슬한 대숲 속에, 우리의 발밑에 흔적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도대체 누가, 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이토록 잔인하게 파괴하였는가?
시간을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아주 옛날옛적에, 우리 선조들이 영암에 살게 된 까닭은 월출산 때문이었다. 바닷가에서 먹이를 구해 생활하던 선조들은 외적이 침입해 오면 월출산으로 피신하곤 했다. 달이 뜨는 모습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최상의 피난처였기 때문에 월출산 자락에서 살게 된 것이다. 당시 우리 조상들에게 월출산은 그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외세불가침의 성역이었다. 산 위에서 지천으로 널린 돌을 던지고 굴리며 언제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덕분에 월출산 자락에는 점차 사람이 불어났고, 싸움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장기전을 벌일 수 있도록 곳곳에 산성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던 회문리 뒤쪽 산성에는 망대를 세우고, 얼마간의 군량과 물과 무기도 비축하여 다들 산성대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쉽게도 산성대는 공간이 협소한 데다가 물이 부족했다. 너무도 가팔라서 부녀자들이 피신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우리 선조들은 고심 끝에 대안을 모색했다. 고대 중국인들처럼 산성 가까운 망호리 뒷산을 진산(鎭山)으로 삼아 읍성을 만들기로 했다. 군인과 백성과 행정기관이 함께 머무를 읍성 축조에 나섰다. 읍면마다 할당량을 주고, 대를 이어 계속 쌓아 나갔다. 1417년 마천목 장군이 병영성을 광주에서 강진으로 옮기고, 이듬해 삼도도통사 유정현이 읍성 축조를 제안한 데 이어, 1429년에는 병조판서 최윤덕까지 나서서 읍성 설치의 시급성을 아뢰자, 세종은 각 변방에 읍성 축조를 서두르도록 했다. 이때부터 영암군민들은 조정의 통제하에 기존에 있던 읍성을 개보수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서둘러 22년 만인 1451년(문종1년)에 완공 보고서를 올렸다.
그 후로도 잦은 보수를 거친 영암성은 2009년 8월 전라남도 문화재연구원의 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성곽 둘레가 2.01km에 해자 흔적이 있고, 객사와 동헌 등 큰 건물이 무려 15동이나 되는 전라도 최대 규모의 읍성이었다. 전라도 육군본부인 병영성보다 두 배 가까이 큰 영암성은 1555년 5월 을묘왜변 때 양달사 의병장의 영암성 대첩으로 성 안 백성들과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말기, 고종을 굴복시킨 일제는 자기네 선조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축조된 읍성을 마주하기가 내심 부끄러웠는지 도로 건설과 상권 활성화명목으로 성곽 훼철에 팔을 걷어붙였다. 1907년 7월 30일, 이등박문은 제1호 내각령으로 성곽을 법적으로 훼철할 수 있는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이완용을 비롯한 내각대신들이 성곽 훼철에 만장일치로 찬성하곤 하면서 동대문 주변 성곽을 비롯한 전국의 성곽들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조선인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인지 이 위원회는 1년 만에 폐지되었지만, 이후로도 성곽을 허무는 망치 소리가 전국에서 그칠 날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추진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성곽 훼철을 더욱 부채질했다. 당시 일제는 조선 이민의 붐을 타고 몰려온 일본인들에게 성곽 안팎의 공공용 토지를 헐값에 불하(拂下)하였고, 일본인들은 이 땅들을 잘게 쪼개 우리 조선인들에게 두세 배의 값으로 팔아넘기면서 단숨에 조선의 중심지 상권까지 장악했다. 물론 영암 성곽의 훼철에는 1928년 영암성당 자리에서 현재의 자리로 이전 신축된 영암군청을 비롯한 관공서와 종교시설 등도 한몫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철도가 영암성을 통과하지 않아 적어도 일제 강점기에는 3개의 성문과 군청 주변 말고는 영암성의 훼철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영암의 유지들은 중장비를 동원하여 성벽을 모조리 긁어내렸고, 일부는 성돌과 목재들을 팔아 쏠쏠한 재미까지 보았다. 그리고 70년대 새마을운동은 남은 성돌들을 도로 경계석과 주춧돌과 담장석 등으로 활용하면서 빗자루질하듯이 말끔히 쓸어냈다. 반만년 영암군 역사상 최초로 영암군민들이 피땀을 흘리면서 대를 이어 조성한 최고의 걸작 영암성은 남녘을 호령하던위풍당당한 동헌 건물과 임억령의 시구가 걸려 있던 고풍스러운 객사, 김시습의 흥취가 깃든 대월루 등과 함께 그렇게 자취를 감췄다.
현재 영암군에서 달맞이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처참하게 파괴된 성터를 군민이 보고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이자 역사문화 체험공간으로 만들자는 사업으로, 본 사업의 추진과 관련하여 현재 군에서 영암읍성의 활용과 보존을 위한 용역을 진행할 것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차제에 달맞이공원 조성사업과 연계한 영암성 보존사업도 활발히 추진되어 영암성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조금이나마 해소되기를 기대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오늘의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