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가족 보고싶어 통일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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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가족 보고싶어 통일됐으면…”

영암읍 거주 새터민 김 현 숙(가명) 씨

2003년 남한 땅 밟아 ‘제2의 삶’
4년전 중국의 남편과 딸 불러와
현재생활 만족…늘 감사하는 마음

“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보고싶습니다. 통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5월 ‘가정의 달’이지만 그리운 가족들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 새터민 김현순(가명·47·영암읍)씨.
영압읍 회문리 영애원에서 조리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현순씨는 영암 관내 몇 안돼는 새터민 중 하나다. 한국 땅을 밟은지 7년째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북한을 떠나온지는 12년째다.
북을 두 번씩이나 탈출하며 한국에 정착한 김씨는 현재의 삶이 그저 만족스럽기만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북의 가족, 친지들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
“지금 생활이 행복해요. 만족하고, 일이 즐겁고, 일하는 보람도 느낍니다”
김씨는 밝은 표정에 웃음도 많고, 쾌활한 성격으로 주위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며 호감을 산다. 대담 중에도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영애원에서 조리원으로 일하게 된지 6년째인 그는 2003년 단신으로 한국에 왔지만 2005년 중국에 남아있던 남편과 딸(9·영암초)을 불러와 더욱 행복한 삶을 꾸려가고 있다.
김씨는 함경북도 청진市가 고향이다. 1998년 처음 北을 탈출해 중국 연변에 정착했지만, 2000년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되는 좌절을 겪었다. 수개월 후 재탈출에 성공, 흑룡강성 출신 조선족 남편과 결혼하고 딸도 낳았다.
또 늘 눈에 밟히는 혈육은 올해 초등학교(영암초) 2학년인 딸이다. “중국에 딸을 두고 먼저 떠나올 때 가장 가슴이 아팠다”는 김씨. 그동안 엄마가 북한에서 온 사람인지 모르던 딸이 최근에야 이를 알고 의아한 눈길로 쳐다 보더라는 것. 김씨는 앞으로 아이가 커가면서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될지 조금은 걱정스럽다.
“아이가 언제쯤 엄마를 이해하게 될까…”
김씨가 결코 잊지 못하는 시간은 2003년 1월 30일 새벽 3시 30분. 김씨가 인천공항에 첫발을 내딛던 순간이다. 김씨는 중국내 탈북 동료 50여명과 함께 조바심과 기대감, 절반의 불안감을 안고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딛었던 그날 그 시간을 정확히 기억했다.
중국 연변에 살던 시절 항상 숨어다니고, 불안하고,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고 회고하는 김씨는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한국으로 가야만 한다”고 결심하고 목숨을 건 한국행을 감행했다고 한다.
2000년 북을 재탈출한 후 한국 땅을 밟을 때까지 그간의 사연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기구했지만, 운명의 질긴 고리처럼 고비 고비 때마다 김씨에게는 늘 기적같은 행운이 따랐다.
“공안에 붙잡히는 등 위기 때마다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제가 운이 좋고 인복(인덕)이 많은 것 같아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고 있습네다”
남한에서 일자리를 구하던 때. 6년전 영암영애원에 면접을 보러가던 한 탈북친구를 동행해 영암에 왔던 것이 영암과의 인연과 남한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게된 계기가 됐다. 면접을 봤던 친구 대신에 길동무로 따라온 김씨가 채용된 것이다. 김씨는 이를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 집을 장만하고, 딸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뒷바라지 잘하면서 살고픈 것”이 희망인 김씨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 아직 이렇다할 직업을 갖지 못한 남편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간 고용지원센터 등 여러 곳에 의뢰를 해봤지만 딱히 안정된 일자리를 못찾았다며, 아직 외국인 신분인 남편에 대해 “외국인이라는 편견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말했다.
/변중섭 기자
변중섭 기자 jusb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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