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군서면 도장리 출신 미국 영암군 홍보대사 |
강폭이 150미터쯤 될까. 넓은 강바닥이 허옇게 맨살이 드러나 있다. 벌써 몇 개월째 저 모습이다. 어느 해 큰 비 온 다음 날, 시뻘건 황토물이 강둑이 넘칠 정도로 강을 꽉 채워 우렁우렁 소리를 지르며 내달리던 모습을 기억한다. 물 따라 노닐던 청둥오리, 황새 등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도 그친 지 오래고, 물과 함께 있던 풍경도 사라진 지 오래다. 물이 들어오는 날, 그들도 따라 돌아올 것이다. 자연의 섭리다. 강은 흘러야 강이다.
어느 집 울타리에 나팔꽃이 줄지어 피어있다. 울타리 꼭대기에 올라선 나팔꽃 하나가 바람결에 흔들린다. 산 정상에 올라 깃발을 흔드는 산악 대장 같다. 아침마다 싱싱하게 나팔을 불어 반겨주는 녀석들의 속 모양이 궁금해 꽃 하나를 툭 땄다. 꽃 속을 들여다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꽃 속 이글거리는 촛대의 모습을 눈이 부셔 바로 볼 수가 없다. 필라멘트가 가볍게 떨고 있다. 만지면 불에 데일성싶다. 지칠 줄 모르며 번식하고, 끝없이 타고 오르는 녀석들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엔젤레스 트럼펫 나무가 보인다. 나팔꽃과 함께 트럼펫을 불어 아침을 깨우는 저 녀석들. 나무 가득 노란색 트럼펫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벌들이 꽃 속을 부지런히 들락거린다.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여 근무하는 중이다. 저런 모습은 게으름과 싸우며 게으름을 꿈꾸는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강둑을 한 바퀴 돌아 집에 들어선다. 무화과 열매가 많이도 열렸다. 저놈들은 처음엔 좁쌀만 하다가 손톱만 하다가, 톡톡 불거지며 땡볕 아래 튀밥 튀듯 익기 시작한다. 올해도 한동안 열매를 수확하느라 바쁠 것이다. 이웃과 나눠 먹고도 남아돌 만큼 넉넉히 주는데, 찬바람이 일면 익기를 뚝 그친다. 해마다 녀석의 등골을 빼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겨울이면 닭똥 한 포씩을 꼬박꼬박 진상하지만 그래도 주는 것 보다 받는 게 훨씬 많아 늘 미안하다. ?
창문을 활짝 연다. 뒤뜰 석류나무에 앉은 새들의 울음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려 녀석들이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커피를 내린다. 냄새가 거실에 번진다. 똑똑 떨어지는 커피 소리를 들으며 찰떡 한 개를 냄비에 굽는다. 떡 구워지는 냄새가 고소하다.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바삭거리는 찰떡을 먹으면서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이 시간이 좋다. 사소하고 시시한 것들이 주는 행복이다.
요 며칠 사이 '너무 고마워서 슬픈 것'이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은 일이 있었다. 부부사이 일이라 밝히기엔 멋쩍은 일이지만, 40년 넘게 살아온 아내로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게 사실 좀 생뚱했다. 기대치를 한 눈금 낮출 때 찾아오는 선물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오늘 점심은 혼자 해결해야 한다. 쌀을 한 컵 씻어 밥을 안쳤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